▒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101) - 白羊紀行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2. 3. 16:27
오늘 그린 풍경화 - 백양기행





지난 일요일(10월 27일) 아침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옛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자니 몸이 근질근질거렸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오후엔 자전거를 타고 백양사의 애기단풍을 보러가리라 다짐했었는데, 그 마음의 약속이 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점심도 드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바람한 줌 세차게 불더니 날이 갭니다. 바람이 자니 햇살이 따사롭게 좁은 등을 비춥니다.

그래 망설이면 안되지. 얼른 떠나야지. 마음이 서두니 덩달아 몸도 바빠집니다. 장성읍내에서 백양사까지 가려면 한 30여분이면 족합니다. 하지만 차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단풍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차들 때문에 몸살을 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머리를 좀 썼답니다. 자전거를 차에 싣고 한참을 간 뒤에 거기서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내 몸에 맞게 페달을 밟고 가슴으로 등에 비추는 햇살과 온 몸에서 삐질거리는 땀방울은 가슴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식히면 가을 한 낮의 즐거움은 환상이 됩니다.

밀리는 차안에서 짜증을 내거나 창 밖으로 앞을 바라보며 어서 빨리 차가 빠지기를 기다리지만 그게 마음먹은대로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마음밭이 고르게 자라지 않아 고소한 생각도 드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다가 얼른 마음을 돌려, 세상의 온갖 욕망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휘돌림속에서 살다가 좀 더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자연을 접하며 삶의 의욕을 재충전하고자 지친 몸을 끌고 왔을 저 사람들, 가족간의 화목과 고운 웃음을 위해 동자치먹고 김밥 몇줄 싸가지고 왔을 저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집니다. 이렇게 전 극과 극을 왔다갔다 하는 아직은 마음공부할게 많은 사람이나 봅니다.

아직 단풍이 절정은 아닙니다. 비가 충분하지 않아서인지 벌서 잎이 마르기도 하고 아직은 초록빛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전국 각지의 여러 단풍이 절경이지만 백양사의 단풍이 좋은건 비자림의 진녹빛과 함께하는 붉은 빛 단풍과의 오묘한 조화 때문입니다. 산그늘에 좀 쉬고 싶으면 백양사 뒤로 보이는 '학바위'의 당당함을 올려보면 묘한 멋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오후의 편안한 햇살을 받으면 흰빛의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 보여지기도 하고, 돌바위가 주는 날카롭고 매서운 맛이 세속에 찌든 욕망을 다 내어놓지 않으면 그 날카로움이 칼이 되어 내 욕망을 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저녁 햇살에 늬엿지는 노을빛과 함께 하면 그 맛은 녹차 한잔을 앞에 두고 온갖 세상 시름을 잊은 평온함과 함께 신령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풍광 수려한 곳에는 모두 절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에 백양사가 주는 절집의 맛은 유별납니다. 여느 절집처럼 국보나 보물의 문화재가 많아서가 아니라 백양사엔 법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백양사의 오늘의 이름을 갖기까지 여러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처음에는 백암사로 불리우다가 뒤에 정토사로 바뀌었는데, 조선조 때에 환양선사가 <금강경>을 설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뒤에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참 진리를 깨쳐 다시 천상으로 갑니다."
큰 절을 올리고 떠난 흰 양은 다음 날 절 앞에 죽어있어서, 그 때부터 백양사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나는 이 백양사의 창건설화를 생각할 때마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진리와 가르침이 있는데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배우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다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다시금 '잘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는 것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가립니다.

모처럼 타는 자전거라 좀 힘에 부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풍빛에 취해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으로 내 마음의 피곤함이 모두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풀어져 흐릅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때는 기온이 10℃가 될 때입니다. 이 10℃의 온도가 봄에는 싹을 틔웁니다. 연록빛 신록이 잎움을 틔우는 시기, 바로 초봄의 날씨가 10℃의 기온입니다. 나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곰곰 생각해 보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오랫동안 곱씹어봅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부터 달려온 단풍은 시속 1km 정도의 매우 느린 속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면 단풍 바라볼 시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어느새 깊은 가을밤의 스산함에 몸을 움츠리게 됩니다. 저만치 달려가고 있지만 조금의 여유를 부려본다면 내 욕심껏 단풍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단풍철은 꼭 단풍 관광지가 아니어도 내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사실. 백양을 오가며 자전거로 둘러본 산천은 삶의 활력입니다.



2001년 11월 1일
자작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