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말없이 하루를
밤을 하얗게 새웠습니다. 가슴에 떠오르는 달빛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오늘 하루종일 가장 편안한 자세로 모든 문명의 흔적들을 떨군 채 전화며 티브이며 모든 소리를 끊고 내면의 울림만을 들으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아침에, 아니지 새벽에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밥 먹는 것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고 내가 일상의 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밥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 혼자 있음의 숨결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허리가 아픕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이스크림이 하나 있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적막의 울안에서 겨울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9월인데. 진부령 고갯길을 넘으며 먹어보겠다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우유팩 하나가 얼어서 샤베트가 되었답니다. 그 아찔한 칼바람이 초가을 하늘빛으로 되살아나는 오랜 추억의 맛이 온 몸을 편안함에 젖게 합니다.
코스모스가 한창입니다. 따로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작년에 났던 곳을 잊지 않고 무리 지어 피기도 하고 길거리에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으로 심어 가꾼 코스모스도 있지만 어쨌거나 코스모스는 남빛 물이 뚝뚝 질 것 같은 하늘이 없다면 외로웠을 것입니다. 코스모스는 하늘빛과 궁합이 맞다는 얘기죠.
말을 하지 않아 좋습니다. 평상시에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사는데 오늘처럼 가끔은 말이 없는 시간의 담 안을 혼자 걷다보면 갑자기 소리의 폭포가 쏟아집니다.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내면의 울림이 들려옵니다. 억눌려온 진실의 소리 같습니다. {수심결(修心訣)}이라는 책에 [여석압초(如石壓草)]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멩이로 눌러 놓은 풀과 같다는 뜻인데, 이말이 지금 왜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내 안의 진실을 혹은 거짓을 돌멩이로 눌러놓은 것처럼 억압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라는 뜻인 듯 합니다. 참 나, 거짓과 위선의 탈들이 하나씩 벗겨질 때 그 것들이 떠나갈 때 결국은 나 혼자임을 자각하라는 뜻 같습니다.
늦은 밤입니다.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고행자의 수행처럼 힘이 듭니다. 화장실엘 갔습니다. 집옷을 벗은 달팽이 한 마리가 마른 타일 위를 미끌어져 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 이슬 내린 풀잎, 혹은 배추잎처럼 싱그러운 땅위를 기어가야 할텐데, 2001년 오늘 내 방에 추적추적 비가 내립니다. 잊고 싶은 망각의 비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아야 하는 절망의 환희를 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 하나는 살아있다는 이 사실 하나가 얼마나 큰 은혜이며 행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 분명 나는 살아있습니다. 달팽이를 집어들었습니다. 몸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급히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고 마당 한 켠의 호박잎 사이로 내려주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으로 살겠지 바람으로 말입니다.
난 가만 있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세상을 향해 소리지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날 가만 두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항상 내가 옳았다고 외칠 수 있는가. 나의 외침은 메아리가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말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의해서만 이 사회가 변화 발전하고 진급하고 성숙하는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녁창을 열었습니다. 온몸을 감아 도는 밤안개는 달빛 아슴한 재봉산 산허리를 탈춤판 외사위 마냥 감겨져 있습니다. 내 주위에 지금 무엇이 있나 살펴봅니다.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 마음 챙기고 나면 내 곁엔 수없이 많은 인연의 씨앗들과 싹, 그리고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글을 가장 망치는 것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입니. 내 안에서 삭지도 않았는데 풋내나는 김치맛처럼 그냥 그냥 키워낸다는 건 기계적 글쓰기이지, 삶의 글쓰기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나를 감싸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모둠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언젠가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원고지를 수만장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만들려고 만든게 아니라 지금은 잘 쓰지도 않는 4절 갱지가 수천장 있길래 그걸 자르고 칸을 그어 만든 것입니다. 원고지 위를 서섯거리는 펜의 촉감에 행복했습니다. 파지가 늘어납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낭비입니다. 컴퓨터야 얼마나 편한가. 썼다 지웠다를 맘대로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지리하지만 원고지에 쓰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건 원고지 틀의 소리를 조심스레 옮기는 작업일 뿐입니다.
나를 기억하는 수많은 인연들을 생각해보는 소중한 하루였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자작나무숲
밤을 하얗게 새웠습니다. 가슴에 떠오르는 달빛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오늘 하루종일 가장 편안한 자세로 모든 문명의 흔적들을 떨군 채 전화며 티브이며 모든 소리를 끊고 내면의 울림만을 들으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아침에, 아니지 새벽에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밥 먹는 것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고 내가 일상의 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밥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 혼자 있음의 숨결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허리가 아픕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이스크림이 하나 있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적막의 울안에서 겨울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9월인데. 진부령 고갯길을 넘으며 먹어보겠다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우유팩 하나가 얼어서 샤베트가 되었답니다. 그 아찔한 칼바람이 초가을 하늘빛으로 되살아나는 오랜 추억의 맛이 온 몸을 편안함에 젖게 합니다.
코스모스가 한창입니다. 따로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작년에 났던 곳을 잊지 않고 무리 지어 피기도 하고 길거리에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으로 심어 가꾼 코스모스도 있지만 어쨌거나 코스모스는 남빛 물이 뚝뚝 질 것 같은 하늘이 없다면 외로웠을 것입니다. 코스모스는 하늘빛과 궁합이 맞다는 얘기죠.
말을 하지 않아 좋습니다. 평상시에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사는데 오늘처럼 가끔은 말이 없는 시간의 담 안을 혼자 걷다보면 갑자기 소리의 폭포가 쏟아집니다.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내면의 울림이 들려옵니다. 억눌려온 진실의 소리 같습니다. {수심결(修心訣)}이라는 책에 [여석압초(如石壓草)]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멩이로 눌러 놓은 풀과 같다는 뜻인데, 이말이 지금 왜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내 안의 진실을 혹은 거짓을 돌멩이로 눌러놓은 것처럼 억압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라는 뜻인 듯 합니다. 참 나, 거짓과 위선의 탈들이 하나씩 벗겨질 때 그 것들이 떠나갈 때 결국은 나 혼자임을 자각하라는 뜻 같습니다.
늦은 밤입니다.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고행자의 수행처럼 힘이 듭니다. 화장실엘 갔습니다. 집옷을 벗은 달팽이 한 마리가 마른 타일 위를 미끌어져 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 이슬 내린 풀잎, 혹은 배추잎처럼 싱그러운 땅위를 기어가야 할텐데, 2001년 오늘 내 방에 추적추적 비가 내립니다. 잊고 싶은 망각의 비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아야 하는 절망의 환희를 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 하나는 살아있다는 이 사실 하나가 얼마나 큰 은혜이며 행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 분명 나는 살아있습니다. 달팽이를 집어들었습니다. 몸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급히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고 마당 한 켠의 호박잎 사이로 내려주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으로 살겠지 바람으로 말입니다.
난 가만 있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세상을 향해 소리지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날 가만 두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항상 내가 옳았다고 외칠 수 있는가. 나의 외침은 메아리가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말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의해서만 이 사회가 변화 발전하고 진급하고 성숙하는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녁창을 열었습니다. 온몸을 감아 도는 밤안개는 달빛 아슴한 재봉산 산허리를 탈춤판 외사위 마냥 감겨져 있습니다. 내 주위에 지금 무엇이 있나 살펴봅니다.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 마음 챙기고 나면 내 곁엔 수없이 많은 인연의 씨앗들과 싹, 그리고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글을 가장 망치는 것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입니. 내 안에서 삭지도 않았는데 풋내나는 김치맛처럼 그냥 그냥 키워낸다는 건 기계적 글쓰기이지, 삶의 글쓰기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나를 감싸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모둠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언젠가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원고지를 수만장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만들려고 만든게 아니라 지금은 잘 쓰지도 않는 4절 갱지가 수천장 있길래 그걸 자르고 칸을 그어 만든 것입니다. 원고지 위를 서섯거리는 펜의 촉감에 행복했습니다. 파지가 늘어납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낭비입니다. 컴퓨터야 얼마나 편한가. 썼다 지웠다를 맘대로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지리하지만 원고지에 쓰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건 원고지 틀의 소리를 조심스레 옮기는 작업일 뿐입니다.
나를 기억하는 수많은 인연들을 생각해보는 소중한 하루였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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