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아름다운 귀향(임오년 새해를 보내고)
강원도 인제 미시령 고개 입구에 있는 특공대에서 군 생활할 때입니다. 포상 휴가를 받아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면회를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형제들 안부를 묻다가 나머지 세 형제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큰 형님은 광주에서 서울에 올라오는 길이고, 둘째 형님은 서울에 살고 있었고, 막내는 삼성에 시험을 치르러 올라와 있었습니다. 우리 둘만 가면 5형제가 다 모이는 것입니다. 부모님 계시는 강원도 정선 사북(舍北)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언제나 우리 5형제를 알뜰히 챙겨주시던 외삼촌댁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누가 제안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5형제가 다 모이기 힘드니 사진을 찍자'고 하여 그 길로 근처 사진관에 가서 큼지막한 사진을 두 장 찍었습니다. 한 겨울이라 모두 두툼한 옷을 입었는데 작업복, 양복, 군복, 파카 등 갖가지의 옷을 입은 그야말로 어색한 사진이지만, 5형제가 모두 사진을 찍은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꼭 누군가 하나가 빠져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빠졌었습니다.
그 사진을 찍은 뒤로 정확히 15년이 흘렀습니다. 5형제는 모두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큰 형님은 광주, 둘째 형님은 남양주, 넷째 동생은 부천, 막내는 서울, 그리고 한 가운데 셋째인 난 익산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자식 욕심 많은 나만 셋이니, 사촌이 사내가 8명, 여식이 3명 모두 11명입니다. 부모님도 익산에 살고 계십니다. 그 동안 명절 때도 다 모이기 힘들었는데 이번 설엔 전부 모였습니다. 광주에 사는 형님내외가 가장 먼저 올라왔습니다. 2번과 5번이 한 차로 열댓 시간 동안 차를 몰아 10일 새벽에 도착했고, 4번 가족이 열차로 11일 저녁 9시에 도착했습니다.
가족이 모두 23명이니 준비하는 음식의 양도 만만치 않습니다. 워낙에 먹성들이 좋아 큰 소쿠리로 몇 개씩이나 전을 부치고, 몇 통의 나물을 준비합니다. 매 번 식사 때마다 간단히 준비해 먹자고 해도 사람 숫자가 많다 보니 설거지해야 할 그릇도 50여 개가 넘습니다. 몇 해전부터 설거지는 남자형제들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다섯이지만 음식 장만하는데 워낙 힘이 들어 나부터 설거지를 하고 동생들을 다그쳤더니 따라 하고, 형님들도 한 두 번씩 거들기 시작하여 우리 집안에서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음식 준비를 대충 마치고, 설 전날 며느리들만 찜질방엘 갔습니다. 시댁 흉(?)이나 남편들 흉(?)보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저녁 12시 넘은 시간에 돌아와 시원한 맥주로 쌓인 피로까지 말끔하게 털어 냅니다.
아이들은 방방을 차지하고 앉아 사촌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어린 사촌들끼리 애정 표현이 지나쳤는지 가끔 울음소리도 들리지만 자기들끼리 서로 달래가며 사촌간의 정의를 쉬지 않습니다.
난 본관이 함평 이가입니다. 호남가의 첫 머리에 나오는 '함평천지(咸平天地)'가 바로 고향이며, 관향입니다. 우리 집은 함평 이씨 조상님들만을 위해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은 순천 박씨, 며느리들은 평산 신씨, 충주 임씨, 해주 오씨, 청풍 김씨, 김해 김씨라 가족별로 차례를 지내면서 며느리들의 조상님들까지 함께 차례를 모십니다. 이렇게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실천을 계속 이어 가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는 한 핏줄 한 형제의 자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차례 지내고 세배를 올리고 받으면서 잠깐 소란이 입니다. 우스개로 누군가가 세뱃돈을 어떻게 주느냐고 묻길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자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내가 가장 유리(?)하다고 반대가 심합니다. 학생은 좀 더 주자고도 하고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결국은 처음 각자가 생각한대로 알아서 주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수지를 대조(?)해 보니 조금 더 나가기는 했지만, 조카녀석들 볼에 퍼지는 웃음 값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생신이 초이튿날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형제들 모두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이른 점심으로 생일상을 차려 드리고 서둘러 귀경을 서두릅니다. 12시가 넘은 시간에야 도착했다는 연락이 옵니다. 모두 힘든 하루였을 것입니다.
명절 지낸 뒤 다시 한 번 명절이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부모님이 강원도에 계실 때보다는 오가기는 수월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절 때 오가기는 만만찮은 길인데, 열 댓시간씩 밀리는 길에서 고생하며 고향을 찾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느끼는 명절의 의미가 다 있겠지만, 만남·성장·나눔·약속이 명절의 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려서 함평 시골에 살 때에는 동네가 함평 이씨 집성촌이라 모두가 친인척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촌 당숙이나 육촌 형제들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지금은 사촌끼리도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형제 자매끼리의 만남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명절이 되면 모든 일 접어두고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카들은 1년에 두어 번 보니 그 때마다 쑥쑥 자라있습니다. 아이들 몸 키는 빠르게 자랍니다. 명절은 그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몇 차례 안 되는 기회입니다. 아이들 몸 키 뿐 아니라, 마음의 키까지 살펴볼 수 있는 참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부분은 채워주고 넘치는 부분은 나눠주는 형제들간의 참 윤기가 건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어른들도 지난 한 해를 결산하면서 얼마만큼 마음의 키를 키우고 좀 더 성숙한 삶을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명절엔 과식하기가 쉽습니다. 여간한 자제력이 아니면 평소 먹지 않던 음식에 욕심내지 않기가 여간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명절엔 온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서로 나눕니다. 어머님은 가을 햇살에 말린 나물을 준비하고 며느리들은 며느리들대로 음식을 준비합니다. 서툰 일이지만 남자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거듭니다. 모두 함께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 음식 뿐 아니라 그 동안 서로 몰랐던 기쁨과 슬픔 등 삶의 희로애락을 나눕니다. 건강하고 부자 되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덕담도 챙겨 담기가 힘들 정도로 넘치게 나눕니다. 모두 자녀를 키우다보니 자녀교육에 대한 정보도 나눕니다. 아이티업계에서 일하는 막내 동생은 '자녀를 위한 인터넷 활용법'에 대해 열강을 합니다. 이것도 모두 명절이 주는 나눔의 미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가정과 일터로 헤어져 갑니다. 다시 만남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합니다. 일상을 떠나 가족들과 만나 가족이 주는 여유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 마음을 챙길 때쯤이면 힘든 귀경길도 견딜 만 합니다.
만나서 서로의 성장을 확인한 뒤, 살아오면서 함께 하지 못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다시금 만남을 약속합니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리가 다름 아닌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강원도 인제 미시령 고개 입구에 있는 특공대에서 군 생활할 때입니다. 포상 휴가를 받아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면회를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형제들 안부를 묻다가 나머지 세 형제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큰 형님은 광주에서 서울에 올라오는 길이고, 둘째 형님은 서울에 살고 있었고, 막내는 삼성에 시험을 치르러 올라와 있었습니다. 우리 둘만 가면 5형제가 다 모이는 것입니다. 부모님 계시는 강원도 정선 사북(舍北)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언제나 우리 5형제를 알뜰히 챙겨주시던 외삼촌댁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누가 제안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5형제가 다 모이기 힘드니 사진을 찍자'고 하여 그 길로 근처 사진관에 가서 큼지막한 사진을 두 장 찍었습니다. 한 겨울이라 모두 두툼한 옷을 입었는데 작업복, 양복, 군복, 파카 등 갖가지의 옷을 입은 그야말로 어색한 사진이지만, 5형제가 모두 사진을 찍은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꼭 누군가 하나가 빠져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빠졌었습니다.
그 사진을 찍은 뒤로 정확히 15년이 흘렀습니다. 5형제는 모두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큰 형님은 광주, 둘째 형님은 남양주, 넷째 동생은 부천, 막내는 서울, 그리고 한 가운데 셋째인 난 익산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자식 욕심 많은 나만 셋이니, 사촌이 사내가 8명, 여식이 3명 모두 11명입니다. 부모님도 익산에 살고 계십니다. 그 동안 명절 때도 다 모이기 힘들었는데 이번 설엔 전부 모였습니다. 광주에 사는 형님내외가 가장 먼저 올라왔습니다. 2번과 5번이 한 차로 열댓 시간 동안 차를 몰아 10일 새벽에 도착했고, 4번 가족이 열차로 11일 저녁 9시에 도착했습니다.
가족이 모두 23명이니 준비하는 음식의 양도 만만치 않습니다. 워낙에 먹성들이 좋아 큰 소쿠리로 몇 개씩이나 전을 부치고, 몇 통의 나물을 준비합니다. 매 번 식사 때마다 간단히 준비해 먹자고 해도 사람 숫자가 많다 보니 설거지해야 할 그릇도 50여 개가 넘습니다. 몇 해전부터 설거지는 남자형제들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다섯이지만 음식 장만하는데 워낙 힘이 들어 나부터 설거지를 하고 동생들을 다그쳤더니 따라 하고, 형님들도 한 두 번씩 거들기 시작하여 우리 집안에서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음식 준비를 대충 마치고, 설 전날 며느리들만 찜질방엘 갔습니다. 시댁 흉(?)이나 남편들 흉(?)보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저녁 12시 넘은 시간에 돌아와 시원한 맥주로 쌓인 피로까지 말끔하게 털어 냅니다.
아이들은 방방을 차지하고 앉아 사촌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어린 사촌들끼리 애정 표현이 지나쳤는지 가끔 울음소리도 들리지만 자기들끼리 서로 달래가며 사촌간의 정의를 쉬지 않습니다.
난 본관이 함평 이가입니다. 호남가의 첫 머리에 나오는 '함평천지(咸平天地)'가 바로 고향이며, 관향입니다. 우리 집은 함평 이씨 조상님들만을 위해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은 순천 박씨, 며느리들은 평산 신씨, 충주 임씨, 해주 오씨, 청풍 김씨, 김해 김씨라 가족별로 차례를 지내면서 며느리들의 조상님들까지 함께 차례를 모십니다. 이렇게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실천을 계속 이어 가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는 한 핏줄 한 형제의 자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차례 지내고 세배를 올리고 받으면서 잠깐 소란이 입니다. 우스개로 누군가가 세뱃돈을 어떻게 주느냐고 묻길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자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내가 가장 유리(?)하다고 반대가 심합니다. 학생은 좀 더 주자고도 하고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결국은 처음 각자가 생각한대로 알아서 주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수지를 대조(?)해 보니 조금 더 나가기는 했지만, 조카녀석들 볼에 퍼지는 웃음 값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생신이 초이튿날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형제들 모두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이른 점심으로 생일상을 차려 드리고 서둘러 귀경을 서두릅니다. 12시가 넘은 시간에야 도착했다는 연락이 옵니다. 모두 힘든 하루였을 것입니다.
명절 지낸 뒤 다시 한 번 명절이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부모님이 강원도에 계실 때보다는 오가기는 수월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절 때 오가기는 만만찮은 길인데, 열 댓시간씩 밀리는 길에서 고생하며 고향을 찾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느끼는 명절의 의미가 다 있겠지만, 만남·성장·나눔·약속이 명절의 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려서 함평 시골에 살 때에는 동네가 함평 이씨 집성촌이라 모두가 친인척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촌 당숙이나 육촌 형제들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지금은 사촌끼리도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형제 자매끼리의 만남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명절이 되면 모든 일 접어두고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카들은 1년에 두어 번 보니 그 때마다 쑥쑥 자라있습니다. 아이들 몸 키는 빠르게 자랍니다. 명절은 그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몇 차례 안 되는 기회입니다. 아이들 몸 키 뿐 아니라, 마음의 키까지 살펴볼 수 있는 참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부분은 채워주고 넘치는 부분은 나눠주는 형제들간의 참 윤기가 건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어른들도 지난 한 해를 결산하면서 얼마만큼 마음의 키를 키우고 좀 더 성숙한 삶을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명절엔 과식하기가 쉽습니다. 여간한 자제력이 아니면 평소 먹지 않던 음식에 욕심내지 않기가 여간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명절엔 온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서로 나눕니다. 어머님은 가을 햇살에 말린 나물을 준비하고 며느리들은 며느리들대로 음식을 준비합니다. 서툰 일이지만 남자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거듭니다. 모두 함께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 음식 뿐 아니라 그 동안 서로 몰랐던 기쁨과 슬픔 등 삶의 희로애락을 나눕니다. 건강하고 부자 되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덕담도 챙겨 담기가 힘들 정도로 넘치게 나눕니다. 모두 자녀를 키우다보니 자녀교육에 대한 정보도 나눕니다. 아이티업계에서 일하는 막내 동생은 '자녀를 위한 인터넷 활용법'에 대해 열강을 합니다. 이것도 모두 명절이 주는 나눔의 미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가정과 일터로 헤어져 갑니다. 다시 만남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합니다. 일상을 떠나 가족들과 만나 가족이 주는 여유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 마음을 챙길 때쯤이면 힘든 귀경길도 견딜 만 합니다.
만나서 서로의 성장을 확인한 뒤, 살아오면서 함께 하지 못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다시금 만남을 약속합니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리가 다름 아닌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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