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208) - 그림 이야기 하나, 남당 문제성의 그림전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2. 9. 18:49
오늘 그린 풍경화 - 그림 이야기 하나, 남당 문제성의 그림전







▣ '그림은 무엇일까?'라는 화두 하나 들고

지난 3월(2000년)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좀은 묵직한 머리를 그냥 두기가 뭐해 너른 만경강(萬頃江)가로 늘 그 자세로 앉아있는 김제평야를 조곤조곤 밟으며 김제 공덕엘 갔다. 풋보리싹이 만들어내는 그 기막힌 청람빛에 취해 한참을 가다보니 전군로 벚꽃길이 만들어내는 알싸한 꽃향이 머리를 맑힌다. 잠시 동안 차에서 내려 벚나무의 까칠한 껍질 속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 깊고 깊은 대지의 생명을 쑥쑥 뽑아 올리고 있는 힘찬 정열이 있었다. 또, 옴살곰살 모여 꽃색을 고르고 있는 꽃눈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하! 봄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을 준다. 난 이렇게 떠나기도 잘하지만 마음이 어지럽고 요란하고 그를 때마다 전라도 땅의 울뚝한 힘을 느끼면 금새 개운해진다. 아마 어쩌지 못하는 남도(南道) 사람인 탓이리라.

공덕면 소재지를 향해가다 보면 '남당마을'이라는 작은 석물이 나온다. 소재지 조금 못미쳐에 있는 마을이다. 제멋대로인 듯 하지만 그 나름의 질서로 따뜻한 봄햇살을 곱게 펴바르고 있는 마을이다. 가면서 보는 풍경들이 낯익다. 분명 처음오는 길인데도 말이다. 그 마을 한 가운데에 문제성 화가의 집이 있다. 잠깐 차 한잔을 나누고픈 오후길이라 소리도 없이 가는 길이다.

평소에 그의 그림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그 그림의 밑바닥은 보지 못했다. 그림은 어떻게 봐야 할까. 미술평론을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에게 다시 묻는다. '도대체 그림은 무엇일까?' 라고 말이다.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엉킨 삼타래처럼 복잡하기만 머릿골을 쉬면 그만 아닌가. 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저 내 오감에 와닿는 그대로를 말이다.

▣ 그림은 어떻게 봐야 하지?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소재이건 객관적인 소재이건 상관없이 자동카메라로 찍어낸 사진이나 관광지 안내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를 그림에 있어서 '魂'의 존재 여부라고 규정짓고 싶다.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더라도 그 그림 앞에 서면 무언가 혼이 느껴져야만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법이나 구도 등 여러 가지 요소로 그림을 평가하지만 그것은 전문가들의 몫이지, 나 같은 머릿골 무거운 사람이 봤을 때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시처럼 음악처럼 그저 편안함을 얻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성의 그림을 보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이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의 의미는 그가 색을 쓸 때 노랑이나 빨강 등 온난 계열의 색을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빛을 그가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전통회화에서 객관적으로 대상을 그려낼 때 그 안에 담겨있는 따뜻한 감동이나 아름다운 시정을 담아 내야 하는데, 그 방법들은 우선 대상을 어떤 구도로 그려내는 가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붓끝에서 살아 숨쉬는 획이나 점, 선, 농담 등이 주는 맛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원칙에 철저하다. 대학강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니 이제 어느 정도의 완숙미도 있겠으나 그는 이러한 것들을 철저히 배격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연필로 구상을 마치고 붓으로 그림의 윤곽을 정확히 잡은 뒤에 그안에 다시 혼을 불어넣는 작업을 한다. 작품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는 이런 지리한 과정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문제성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방랑벽이 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 속에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이력은 고스란히 그림에 옮겨져 있다. 저녁 노을 빛을 닮은 붉은 색의 물감은 전라도 순천땅의 어느 강가에서 손톱밑에 흙넣어가며 가져온 흙을 온 정성으로 빻아서 그 저녁놀색을 만든다. 남원의 어는 산자락에서 주어온 푸른 빛이 감도는 돌은 거친 김제평야의 투박한 질감을 막걸리색으로 풀어낼 때 요긴하다. 경상도 포항을 다녀와서는 검은 흙을 가져다가 검푸른 바다를 만들고 강원도 영월에 가서는 그 동강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울긋한 흙돌을 가져다가 옥수수를 길러낸 거친 밭가에 흐르는 '정선 아리랑'의 목소리를 화폭에 옮겨낸다. 그의 이런 노력들이 '따뜻함'의 밑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다.

그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고전 수묵화의 세계에도 끊임없이 정진하여 그 기법들을 연마하고 특히 수묵화의 색채 및 조형 연구에 정진하여 그 연구의 성과들을 하나씩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순백의 화선지를 앞에 두고 한 필 한 획을 그려갈 때, 내 마음대로 한 필 한 획을 더하지 않고, 순백의 화선지 마음대로 내 맡겨 둔다. 화선지에는 이미 내가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숨어있다. 좀은 어색한 붓질이나 색감들도 화선지 안에 숨겨있는 색으로 서서히 살아온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그림을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좀 어두웠다. 표현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90년대 초반의 그의 작품들 [꿈]·[별을 찾아서]·[꿈을 찾아서] 등은 그의 말대로 "다원화되어진 이 시대의 미술 양식을 화선지 위에 묵과 색이 필에 의해 흡수되어 정신적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승화되어야겠다. 앞으로 묵의 향기와 습윤한 색채와 한국화에서 중요시 다루어져 왔던 필에 의한 선의 격렬한 움직임을 한국화적 재료의 특성을 더 더욱 이용, 대상을 분해하고 모으고 해체해서 지각적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할 것"을 고민했는데 그런 고민의 흔적들에서는 그 안에 담겨있는 미학으로서 따뜻한 영적울림을 주기보다는 다양한 실험정신의 작가혼이 주는 어딘지 모르게 어둠에서 오는 무거움이 있었다.

같은 어둠이라도 새벽보다는 늦밤에 더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는 아파했다. 그 어둠의 긴 터널을 건너오면서 어둠속에서도 따뜻함을 찾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화가로 거듭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이나 실험정신이 약해지거나 없어졌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 이야기를 나누고픈 사람

4월초에 친구 결혼식을 핑계로 서울에 갔었다. 서울이 주는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식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수정한지그림 전시회에 다녀왔었다. '종이로도 이런 작품을 할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하며 한 작품 한 작품 앞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다. 멀리 깊은 산 속의 새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아낙들이 나누는 질펀한 삶의 이야기가 묻어 나고 백조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 오는 듯 해서 두어시간여 동안 그림을 보고 온 적이 있다. 사실 모두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라 남자들이 보러 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혹 작품을 보러온 남자들은 그저 스쳐지나기 바빴지만 난 참 따뜻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번 전시회에 걸릴 문제성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삐죽 머리꼭지가 보이기도 하고, 바람에 묻어 있기도 하고, 눈밭에서 뒹굴기도 하고 풀포기 사이에서 소살대기도 하고, 깊은 강바닥에 잠겨 있기도 하다. 무슨 얘기를 하고픈걸까. 그 이야기들이 어렵지는 않지만 쉽게 찾아지지도 않는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고향에 대한 이야기와 사계에 대한 애정, 사람들과의 만남을 편안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을 훌쩍 지난다면 그 얘기들을 다 들을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한참동안 그림 앞에 주저앉아서라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얘기를 다 듣는다면 아마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향기가 온 몸을 감싸게 될 것이다.

이번 그림들 역시 그의 변화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다양한 소재에서부터 다양한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만난 자연과 혼을 중심에 두고 따뜻한 애정으로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다. 육자배기 가락이 녹아 있는 듯한 고향, 김제의 풍경들을 알뜰하게 챙기며 한 조각 밭, 논 한 배미, 봄 풀들의 이야기, 혁명의 혼이 살아 숨쉬는 듯한 남도 땅 구석구석을 발로 밟고 가슴으로 보듬고 있으며, 경상도와 강원도의 땅 등을 자유로운 붓질과 따뜻한 감성으로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설경은 한없이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마도 많은 눈 내린 다음날 환한 햇살 빛에 은빛으로 녹아있는 눈의 모습들 같다.

그가 딸기를 내온다. 검튀한 낯빛의 사내가 가져온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따뜻하다. 싱싱하다. 남당마을의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의 오랜 습작과 창작의 고통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아련한 포만감을 느꼈다. 순간 아찔하기도 하다. 난 벌써 그의 다음 전시회가 기다려진다. 어떤 변화된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올지를 말이다. 난 3월 하순의 하룻날, 김제 공덕에 가서 그림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가슴 따뜻한 사람 하나 만나고 왔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덧붙임 : 재작년에 그림쟁이 친구인 문제성의 그림전에 몇 마디 꼻기<評>위해 쓴 글입니다. 평론가가 아니라 제대로 그의 그림을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방법으로 쓴 글은 아니고 그저 편안하게 얘기 나누고 그림을 본 제 느낌을 덧댐없이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