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망년지교(忘年之交)
아름다운 사귐을 뜻하는 고사와 성어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전 그 중에서도 망년지교를 참 좋아합니다. 흔히 선후배간에 허물이 없고 격이 없을 때 하는 놀이로 "야자타임"이란 걸 합니다. 야자수를 마시는 시간 같지만 그렇진 않고 평소에 깍듯이 모신 선배나 연장자에게 반말을 하며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야자타임"의 뒤끝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감정이 녹아드는 언행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忘年忘義, 振於無竟(망년망의 진어무경)'라는 글속에 보이는데, '시간을 잊고 이론을 잊어 다함이 없는 곳에서 떨친다'는 뜻입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현영(成玄英)의 풀이에 보면 '年은 태어나면서 받은 것으로 이미 생사와 같은 까닭에 망년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망년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상대적 관념들, 즉 나이를 초월한다는 의미이고, 망의(忘義)는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힌 습관과 특성들, 즉 내 관념으로 자기화한 모든 사상과 철학과 종교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초월하고 벗어난 경계가 바로 모든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입니다. 이 절대, 즉 상대가 끊어진 자리에서의 만남이 바로 망년의 만남 망년지교입니다.
망년지교(忘年之交)는 지혜와 덕을 아울러 갖춘 훌륭한 사람들과 연령에 관계없이 어울림을 뜻합니다. 이 말은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과 연령에 관계없이 어울림을 뜻하기보다는 먼저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이 많은 사람이 품성과 도량이 원만하고 넓어야 합니다. 아랫사람의 실력이 출중하고 큰 인물로 대성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면 모든 분별하는 마음과 나이 먹었다고 하는 '상(相)'이 없어야 가능한 사귐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꼴'을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지는 말만 하고 실행이 없음을 경계는 하나 그 말을 버리지는 않고, 재주만 있고 덕없음을 경계는 하나 그 재주는 버리지 않는 경지입니다. 다음은 사람좋아 만나기 보다는 먼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오랫동안 지속되는 망년의 사귐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난 사람들이 모두 망년의 벗들입니다. 장성에서 반년을 지내는 동안 만난 사람들인데 군청 공무원과 그 부인, 화가, 매실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 정년퇴임하신 선생님과 그 부인, 그리고 저 모두 여덟명인데, 30대 1명, 40대 3명, 50대 2명, 60대 2명입니다. 장성에서 두부요리를 가장 잘 하는 집으로 안내받았는데, 여태 그렇게 맛있는 두부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순두부찌개와 두부청국장찌개인데 그 맛은 뭐랄까, 제가 아직 잊지 않은 내 할머님 해진댁이 해주던 바로 그맛이었습니다. 오가는 정담과 덕담속에 음식도 덩달아 맛을 더하는 것 같았습니다. 반주로 곁들인 동동주맛도 이태백이 주선(酒仙)과 주성(酒聖)을 그리며 달빛 아래에서 홀로 잔 들이키던 월하독작(月下獨酌)의 그 맛과는 자못 다른 맛이었지만, 이 지상에 또 다른 선경(仙境)을 그리기에는 충분한 흥취였습니다. 모두가 한잔씩 마셔 발그레한 얼굴빛이 저녁 어스름 달빛에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녁까지 맛있게 먹었는데 그냥 말 수 없다며 그림 그리는 범해(梵海) 선생님이 집으로 이끕니다. 사실 이럴 때 급하게 밀린 일이 있어도 모두 뒤로 밀쳐 두는 게 상책입니다. 괜히 이런 자리에 빠지면 엄청 손해볼 것 같은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오랜 정담으로 얼굴에 술 빛을 떨구고 달빛 드리워진 맥동(麥洞)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보리를 많이 심지 않지만, 맥동이라는 이름을 보아하니 입춘쯤해서 청보리빛이 근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범해선생님 어머님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십니다. 사실 늦은 시간에 많은 손님 데리고 오는 자식이 미울 법도 한데 어머님 얼굴 어디에서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어서 어서 작업실로 올라가라며 등을 떠미십니다. 전에도 들른 적이 있지만, 범해선생님의 작업실은 흡사 색의 전시장 같습니다. 온갖 물감과 석채(石彩)가루들, 붓과 스케치해 논 작업들, 피어오르는 향내도 모두 아름다운 색으로 보입니다.
주섬주섬 찻잔을 챙기고 차를 주문받습니다. 어색하고 어설퍼도 아름다운게 바로 이런 만남인 듯, 차를 마시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사람으로 나누어졌지만, 찻내음과 커피향내가 어울려내는 묘한 조화의 맛은 심신의 피로를 가시게 하고 무한한 엔돌핀을 솟구치게 합니다. 어머님이 내오신 떡은 배는 부른데도 마냥 들어가는 멋과 흥이 어우러진 맛이었습니다.
그동안 작업하고 있는 그림은 주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인물화인데 존경과 체득(體得)의 마음이 우러나는 정결하고 단아한 느낌의 그림들이었습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 서로 지난 얘기를 나누며 삶의 방식과 은혜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누며, 범해 선생님이 틈나는 대로 모아둔 자잘자잘한 소품들도 모두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열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여간 신명에 불이 붙으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법입니다. 범해 선생님이 쟁(箏 : 거문고 비슷한 13현의 악기)을 꺼내놓고 호흡을 고릅니다. 그 미성을 익히 들어온 나는 여간 기대가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범해 선생님은 그야말로 풍류도인입니다. 겐징겐징 사뿐사뿐 손가락은 소리만들기에 바쁘고 어깨는 들썩들썩 흔들흔들 장단맞추기에 바쁩니다. 함께 한 대중들도 손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얼쑤덜쑤 이렁저렁 신바람이 납니다. 사실 이러다 보면 시간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게 훌쩍 지납니다. 산새들은 쟁 소리 자장가 삼아 잠들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너울너울 춤을 추듯 불어옵니다.
망년의 벗들, 모두 어린 저를 위해 아름다운 사이를 가꾸어 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그 분들을 뒤로하고 장성을 떠나왔습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일상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다시 아름다운 인연의 이야기를 써가야 하겠지만, 장성에서 함께 한 시간들은 아마 영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의 밤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 밤 그분들의 건강을 위해 내 믿음의 당신에게 두 손을 모읍니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아름다운 사귐을 뜻하는 고사와 성어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전 그 중에서도 망년지교를 참 좋아합니다. 흔히 선후배간에 허물이 없고 격이 없을 때 하는 놀이로 "야자타임"이란 걸 합니다. 야자수를 마시는 시간 같지만 그렇진 않고 평소에 깍듯이 모신 선배나 연장자에게 반말을 하며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야자타임"의 뒤끝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감정이 녹아드는 언행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忘年忘義, 振於無竟(망년망의 진어무경)'라는 글속에 보이는데, '시간을 잊고 이론을 잊어 다함이 없는 곳에서 떨친다'는 뜻입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현영(成玄英)의 풀이에 보면 '年은 태어나면서 받은 것으로 이미 생사와 같은 까닭에 망년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망년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상대적 관념들, 즉 나이를 초월한다는 의미이고, 망의(忘義)는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힌 습관과 특성들, 즉 내 관념으로 자기화한 모든 사상과 철학과 종교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초월하고 벗어난 경계가 바로 모든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입니다. 이 절대, 즉 상대가 끊어진 자리에서의 만남이 바로 망년의 만남 망년지교입니다.
망년지교(忘年之交)는 지혜와 덕을 아울러 갖춘 훌륭한 사람들과 연령에 관계없이 어울림을 뜻합니다. 이 말은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과 연령에 관계없이 어울림을 뜻하기보다는 먼저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이 많은 사람이 품성과 도량이 원만하고 넓어야 합니다. 아랫사람의 실력이 출중하고 큰 인물로 대성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면 모든 분별하는 마음과 나이 먹었다고 하는 '상(相)'이 없어야 가능한 사귐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꼴'을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지는 말만 하고 실행이 없음을 경계는 하나 그 말을 버리지는 않고, 재주만 있고 덕없음을 경계는 하나 그 재주는 버리지 않는 경지입니다. 다음은 사람좋아 만나기 보다는 먼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오랫동안 지속되는 망년의 사귐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난 사람들이 모두 망년의 벗들입니다. 장성에서 반년을 지내는 동안 만난 사람들인데 군청 공무원과 그 부인, 화가, 매실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 정년퇴임하신 선생님과 그 부인, 그리고 저 모두 여덟명인데, 30대 1명, 40대 3명, 50대 2명, 60대 2명입니다. 장성에서 두부요리를 가장 잘 하는 집으로 안내받았는데, 여태 그렇게 맛있는 두부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순두부찌개와 두부청국장찌개인데 그 맛은 뭐랄까, 제가 아직 잊지 않은 내 할머님 해진댁이 해주던 바로 그맛이었습니다. 오가는 정담과 덕담속에 음식도 덩달아 맛을 더하는 것 같았습니다. 반주로 곁들인 동동주맛도 이태백이 주선(酒仙)과 주성(酒聖)을 그리며 달빛 아래에서 홀로 잔 들이키던 월하독작(月下獨酌)의 그 맛과는 자못 다른 맛이었지만, 이 지상에 또 다른 선경(仙境)을 그리기에는 충분한 흥취였습니다. 모두가 한잔씩 마셔 발그레한 얼굴빛이 저녁 어스름 달빛에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녁까지 맛있게 먹었는데 그냥 말 수 없다며 그림 그리는 범해(梵海) 선생님이 집으로 이끕니다. 사실 이럴 때 급하게 밀린 일이 있어도 모두 뒤로 밀쳐 두는 게 상책입니다. 괜히 이런 자리에 빠지면 엄청 손해볼 것 같은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오랜 정담으로 얼굴에 술 빛을 떨구고 달빛 드리워진 맥동(麥洞)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보리를 많이 심지 않지만, 맥동이라는 이름을 보아하니 입춘쯤해서 청보리빛이 근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범해선생님 어머님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십니다. 사실 늦은 시간에 많은 손님 데리고 오는 자식이 미울 법도 한데 어머님 얼굴 어디에서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어서 어서 작업실로 올라가라며 등을 떠미십니다. 전에도 들른 적이 있지만, 범해선생님의 작업실은 흡사 색의 전시장 같습니다. 온갖 물감과 석채(石彩)가루들, 붓과 스케치해 논 작업들, 피어오르는 향내도 모두 아름다운 색으로 보입니다.
주섬주섬 찻잔을 챙기고 차를 주문받습니다. 어색하고 어설퍼도 아름다운게 바로 이런 만남인 듯, 차를 마시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사람으로 나누어졌지만, 찻내음과 커피향내가 어울려내는 묘한 조화의 맛은 심신의 피로를 가시게 하고 무한한 엔돌핀을 솟구치게 합니다. 어머님이 내오신 떡은 배는 부른데도 마냥 들어가는 멋과 흥이 어우러진 맛이었습니다.
그동안 작업하고 있는 그림은 주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인물화인데 존경과 체득(體得)의 마음이 우러나는 정결하고 단아한 느낌의 그림들이었습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 서로 지난 얘기를 나누며 삶의 방식과 은혜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누며, 범해 선생님이 틈나는 대로 모아둔 자잘자잘한 소품들도 모두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열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여간 신명에 불이 붙으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법입니다. 범해 선생님이 쟁(箏 : 거문고 비슷한 13현의 악기)을 꺼내놓고 호흡을 고릅니다. 그 미성을 익히 들어온 나는 여간 기대가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범해 선생님은 그야말로 풍류도인입니다. 겐징겐징 사뿐사뿐 손가락은 소리만들기에 바쁘고 어깨는 들썩들썩 흔들흔들 장단맞추기에 바쁩니다. 함께 한 대중들도 손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얼쑤덜쑤 이렁저렁 신바람이 납니다. 사실 이러다 보면 시간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게 훌쩍 지납니다. 산새들은 쟁 소리 자장가 삼아 잠들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너울너울 춤을 추듯 불어옵니다.
망년의 벗들, 모두 어린 저를 위해 아름다운 사이를 가꾸어 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그 분들을 뒤로하고 장성을 떠나왔습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일상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다시 아름다운 인연의 이야기를 써가야 하겠지만, 장성에서 함께 한 시간들은 아마 영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의 밤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 밤 그분들의 건강을 위해 내 믿음의 당신에게 두 손을 모읍니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사 이 가 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그린 풍경화(1101) - 白羊紀行 (0) | 2002.02.03 |
---|---|
오늘 그린 풍경화(0911) - 말없이 하루를 (0) | 2002.02.03 |
오늘 그린 풍경화(0127) - 필암리(筆巖里) 가는 길 (0) | 2002.01.28 |
독서감상문 쓰기 지도 4 (0) | 2002.01.19 |
오늘 그린 풍경화(0508) - 초 여름 햇살 환한 날 (0) | 200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