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옷을 벗는 자작나무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6. 16. 10:44
옷을 벗는 자작나무



햇살아래 부끄러움을 감추고

창가에 누웠을 때

자작나무 곁가지를 지나면

언가슴을 간지럽히는 바람도

내 모습을 비웃습니다.



겨울을 지내기엔

꺼풀들을 감춰둬야 하지만

한올씩 벗어내는 까닭은

사랑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낱없이 드러냄은

당신의 손길이 그리워지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바람대로 나를 굳게 하고

햇샇은 미소로 내 아픈 곳을 어루만지어

움터오는 새살을 키워냅니다.

살갗이 터오고,

시려 붉은 피가 가슴에 솟아오지만

그래도 벅찬 가슴이 되는 것은

당신의 눈길이 늘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굳은 땅으로 뿌리 내릴 수 있는 힘을 얻고

부끄러운 얼굴을 감춤은

내 이제, 안에 있는 모든 인연의 씨앗들을

떨구기 위함입니다.

지난 날의 아린 기억들을 이겨내고

가지 끝에 매달았던 야윈 이파리들과

기인 이별을 아눕니다. 애가 싫다며

어느 날 문득, 바람따라 산너머로 떠나간

인연의 싹들이 있고,

그래도 이별이 슬픈 잎들은

내 발아래에서 시린 발목을 잡고

기인 겨울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꺼풀을 벗어낼 때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바람처럼 햇살처럼

다순 눈길만 주고

디시금 밝아오는 새날에 우뚝 설 수 있게

사랑을 꿈꾸며 나 이제

마지막 한꺼풀 옷을 벗으렵니다.

부끄러우니 쳐다보진 마세요.



◀시작노트▶

미시령 고갯길 바람은 차다. 칼이다.얼굴의 땀샘을 얼린다. 다리는 감각이 없다. 얼었다. 걷는다. 쉬면 안된다. 걷고 또 걷는다.

낯선 나무 몇 그루 보인다. 동료에게 물었다. 자작나무란다. 자작나무. 유심히 보았다. 껍질이 벗겨져 있다. 맨살이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처럼. 묵은 때를 벗겨내듯이 껍질을 벗고 있다.

아!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내 삶의 궤적 가운데 내밀한 튼튼함은 자라게 하고, 밖으로 허물과 아픔과 죄의 씨앗들을 털어낼 수 있을까. 그러고 싶었다.

그게 전부다. 자작나무를 사랑하는 이유의. 한 두 그루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숲을 보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몇 군데서 그 숲을 보았다. 그 까르르한 아이들 웃음같은 자작나무 이파리의 떨림을. 봄 햇살에 부서지듯 찰랑대는 연록의 물결을. 그래서 내 이름이 자작나무숲이다. 내 소망의 기도이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시 의 향 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만경강(萬頃江)  (0) 2002.06.16
노란 지붕을 가진 시골집  (0) 2002.06.16
오늘은  (0) 2002.06.16
옷을 벗으며  (0) 2002.06.16
머리를 빗으며  (0) 200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