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눈빛
1999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난, 베이징의 한 호텔에 묵고 있었다. 매일 오전에 북경대 루우열교수와 민족대 김경진교수를 만나 일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번역한 원고를 읽고 교정을 보는 일이었다. 큰 틀에는 합의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은 굉장히 수월했다. 10여일이 지나자,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어 마지막 원고를 받았다.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 일행(모두 3명)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 처녀가 추이잉진(조선족)이다.
베이징 체류 마지막 날, 만리장성에 가기로 했다. 시내의 주요 관광지는 예전에 가 본 곳이라 겨울 시린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장성에 올라서서 가슴살을 찢으며 불어오는 서북 변방의 바람을 온통 맞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난 어정쩡하게 걸린 감기로 여간 힘이 든 상황이 아니었다. 약을 사 먹긴 했지만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뜨거운 욕조에 온 몸을 담그고 서너 시간 있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잉진’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여간해선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아인데, 함께 지내는 동생을 데리고 가고 싶다 한다. 여태 혼자 지내는 줄 알았는데, 별 일이 아니라 싶어 같이 가자 했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온 아이의 눈빛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눈맞춤이 되지 않는 자폐 성향이 있는 아이 같아 보였다. 건성으로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중국말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영 어색하다.
차에 탄 후에 몇 마디 더 물었더니, 속내를 털어놓는다. ‘잉진’이는 회계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다. ‘영희’가 공안에게 쫓기다 만났는데, ‘잉진’의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게 지금까지 7개월이 넘었다 한다. ‘영희’는 아버님이 함경도의 한 발전소 과장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 배급이 줄어들고, 밭뙈기 하나 없는 가족의 입을 하나라도 덜 요량으로 언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두어달을 구걸하다시피 생활하다가 탈북자들을 쫓아다니는 한족에게 걸려 두 자매가 강간을 당한 뒤에 언니는 한족에게 팔려가 농촌에서 결혼해 지내고, 자기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베이징까지 오게 되었다 한다.
슬픈 눈물이 고이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가슴 저 밑바닥의 분노가 울컥거렸다. 영희의 눈빛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은 언제나 발끝만 쳐다보고, 순간순간 사방을 살폈다. 그렇게 팔달령 정상에 올랐다. 역시나 바람이 세찼다.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은 사내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사내의 객기를 담보한대도 보통의 인내로 한 오리길을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잔뜩 웅크린 채 코트깃을 세우고 한참을 걷는데, 이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금방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목적한 곳에 거의 다 와서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한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 올라올 때 눈빛 매서운 공안을 본 것 같은데, 혹시..’ 누구의 잘잘못이나 책임을 묻기 전에, 영희의 슬픈 과거를 들은터라, 내 책임인 것 만 같았다.
걸음을 서둘렀다. 다 내려오자 한 식당 옆에서 영희가 튀어나온다. 용수철처럼. 뒤따라 올라오다가 앞에서 내려오는 공안을 보고는 지레 겁먹고 다시 내려가 식당 담벽에 웅크린채 우리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내게 남은 몇푼의 돈을 주고 오는 방법밖엔. 나의 무력함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이 너무 싫었다. 내일 비행기를 타면 두어 시간 지나면 한국에 도착한다.
‘잉진’에게 약속한 돈 700위안에 조금 더 보태 1,000위안을 주었다. 일주일 동안 수고한 댓가로는 적잖은 돈이긴 하지만 쉽게 받지 못한다. 조금 더 보태준 것은 ‘영희’를 보살펴 분데 대한 고마움이라고 했다. ‘영희’가 자력을 얻을 때까지 더 도와주라고 했다. 다시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700위안 정도가 남는다. 공항까지 나갈 택시비를 제외하고 동전까지 모두 털어 ‘영희’에게 주었다. 그리고 명함을 주며 다 외우라고 했다. 통일돼서 만나자고.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한 뒤에 피씨방에 가서 아이디를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잊을 만 하면 메일을 보내온다. 둘 다 잘 지내고 있다고. ‘잉진’이는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한다. 지금도 조심스럽지만 ‘영희’는 중국말이 유창해져 한결 지내기가 편하다 한다. 조금씩이지만 돈도 모으고 있단다.
낯익은 거리 베이징의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일어난 탈북난민 25명의 한국행 망명 신청 뒤, 환한 얼굴로 입국하던 그들을 보면서 ‘영희’의 눈빛이 생각난다. 사슴 눈빛을 닮은 그 슬픈 눈빛이. 잘 지내고 있겠지!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1999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난, 베이징의 한 호텔에 묵고 있었다. 매일 오전에 북경대 루우열교수와 민족대 김경진교수를 만나 일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번역한 원고를 읽고 교정을 보는 일이었다. 큰 틀에는 합의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은 굉장히 수월했다. 10여일이 지나자,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어 마지막 원고를 받았다.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 일행(모두 3명)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 처녀가 추이잉진(조선족)이다.
베이징 체류 마지막 날, 만리장성에 가기로 했다. 시내의 주요 관광지는 예전에 가 본 곳이라 겨울 시린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장성에 올라서서 가슴살을 찢으며 불어오는 서북 변방의 바람을 온통 맞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난 어정쩡하게 걸린 감기로 여간 힘이 든 상황이 아니었다. 약을 사 먹긴 했지만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뜨거운 욕조에 온 몸을 담그고 서너 시간 있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잉진’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여간해선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아인데, 함께 지내는 동생을 데리고 가고 싶다 한다. 여태 혼자 지내는 줄 알았는데, 별 일이 아니라 싶어 같이 가자 했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온 아이의 눈빛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눈맞춤이 되지 않는 자폐 성향이 있는 아이 같아 보였다. 건성으로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중국말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영 어색하다.
차에 탄 후에 몇 마디 더 물었더니, 속내를 털어놓는다. ‘잉진’이는 회계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다. ‘영희’가 공안에게 쫓기다 만났는데, ‘잉진’의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게 지금까지 7개월이 넘었다 한다. ‘영희’는 아버님이 함경도의 한 발전소 과장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 배급이 줄어들고, 밭뙈기 하나 없는 가족의 입을 하나라도 덜 요량으로 언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두어달을 구걸하다시피 생활하다가 탈북자들을 쫓아다니는 한족에게 걸려 두 자매가 강간을 당한 뒤에 언니는 한족에게 팔려가 농촌에서 결혼해 지내고, 자기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베이징까지 오게 되었다 한다.
슬픈 눈물이 고이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가슴 저 밑바닥의 분노가 울컥거렸다. 영희의 눈빛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은 언제나 발끝만 쳐다보고, 순간순간 사방을 살폈다. 그렇게 팔달령 정상에 올랐다. 역시나 바람이 세찼다.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은 사내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사내의 객기를 담보한대도 보통의 인내로 한 오리길을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잔뜩 웅크린 채 코트깃을 세우고 한참을 걷는데, 이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금방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목적한 곳에 거의 다 와서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한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 올라올 때 눈빛 매서운 공안을 본 것 같은데, 혹시..’ 누구의 잘잘못이나 책임을 묻기 전에, 영희의 슬픈 과거를 들은터라, 내 책임인 것 만 같았다.
걸음을 서둘렀다. 다 내려오자 한 식당 옆에서 영희가 튀어나온다. 용수철처럼. 뒤따라 올라오다가 앞에서 내려오는 공안을 보고는 지레 겁먹고 다시 내려가 식당 담벽에 웅크린채 우리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내게 남은 몇푼의 돈을 주고 오는 방법밖엔. 나의 무력함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이 너무 싫었다. 내일 비행기를 타면 두어 시간 지나면 한국에 도착한다.
‘잉진’에게 약속한 돈 700위안에 조금 더 보태 1,000위안을 주었다. 일주일 동안 수고한 댓가로는 적잖은 돈이긴 하지만 쉽게 받지 못한다. 조금 더 보태준 것은 ‘영희’를 보살펴 분데 대한 고마움이라고 했다. ‘영희’가 자력을 얻을 때까지 더 도와주라고 했다. 다시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700위안 정도가 남는다. 공항까지 나갈 택시비를 제외하고 동전까지 모두 털어 ‘영희’에게 주었다. 그리고 명함을 주며 다 외우라고 했다. 통일돼서 만나자고.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한 뒤에 피씨방에 가서 아이디를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잊을 만 하면 메일을 보내온다. 둘 다 잘 지내고 있다고. ‘잉진’이는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한다. 지금도 조심스럽지만 ‘영희’는 중국말이 유창해져 한결 지내기가 편하다 한다. 조금씩이지만 돈도 모으고 있단다.
낯익은 거리 베이징의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일어난 탈북난민 25명의 한국행 망명 신청 뒤, 환한 얼굴로 입국하던 그들을 보면서 ‘영희’의 눈빛이 생각난다. 사슴 눈빛을 닮은 그 슬픈 눈빛이. 잘 지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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