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323) - 나의 꿈, 如來의 世上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3. 23. 00:24
오늘 그린 풍경화 - 나의 꿈, 如來의 世上






如來所有性 卽是世間性 如來無有性 世間亦無性
여래가 소유한 자성은 바로 세간의 자성이다.
여래에게 자성이 없으니 세간도 역시 자성이 없다.
<中論 第22 觀如來品 16偈>


▣ 소묘 하나

이 글은 <中論>의 한 게(<中論> 第 22 觀如來品 16偈)에 대한 단상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책을 뒤지고 몇 날을 허위 돌아보아도 명징한 글로 엮어낼 자신이 없다. 그럼 어쩌나. 돌아가야지. <中論>을 공부하면서 얻은 느낌, 딱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동안 가지고 있던 무지를 자각하면서 좀은 가벼워졌다고나 할까. 자연스레 옛 생각을 하게 됐다. 다음은 옛 생각, 내 과거의 일부이다. 내 과거의 전부를 쓰지도 못하면서 한 번 머리속에 그려보는 것은 내 삶의 과정이 주는 행복때문이리라.

지난 일, 삼십대의 사계를 다시 온 몸으로 느껴본다. 아둥바둥대며 살아온 날들이 갑자기 꿈처럼 생각되어질 때 지금 내 모습이 꿈인가, 아닌가. 내 고향은 황톳빛 꿈이 알콩달콩 열리는 전라도 땅 함평인데 나비의 꿈(고향 함평에서 5월이면 나비 축제를 하는데 그걸 보고 莊子의 胡蝶夢을 생각했다.)처럼 훨훨 날아 주유장천하고 있는건 아닌지, 여하튼 깨고 볼 일이다. 어떻게 해야 여래를 볼 수 있고 어떻게 해야 내가 여래가 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꿈은 여래의 세상인가.

매주 수요일 새벽에 잠깨어 창가로 스미는 계절을 따라 내 마음의 힘을 찾다가 희번한 동녘의 햇살이 영글 때쯤 주섬주섬 챙겨들고 광주로 향한다. 온갖 인간 군상들과 대자연의 기인 호흡을 만나게 된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어찌나 빨리 달리며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10년 넘게 운전을 하고 있어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오금이 저릿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때때로 변하면서 여러 상념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자연의 모습에 취하는 기분에 모든 것들이 쉬어지고 녹아진다.

빛고을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피의 흐름이 힘차진다. 늘 숨쉬고 살지만 그 은혜를 잊고 사는 공기의 고마움처럼, ‘민주’의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광주의 민주를 잊고 살다가 광주라는 이정표만 보이면 그 오월의 함성(나는 80년 5월에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있었던 사북사태를 겪고, 함평 시골에 가려다 광주 공항 옆 마을 당숙댁에서 5월의 함성을 들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함성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맴돌았을 뿐이다.)을 다시 듣는 것이다.

내 유년이 흐른다. 광주 월산동과 상무동에서 살던 가난한 어린 시절, 땟국물이 죽죽 흐르던 살갗 사이의 피부 세포 하나 하나가 시름시름 야위어갈 때, 함평군 해보면(咸平郡 海保面 大角里)에 있는 조부모님댁에서 살게 됐다. 도내기(함평군 해보면 대각리에서 대동저수지로 흐르는 조그마한 하천) 개울가에 널려있던 고동, 피라미 등을 잡고, 꽃무릇이 흐드러질 때 쯤이면 왠지 모를 열병을 앓다가 함태골(고향에 있는 산능선자락의 이름)을 끼고 돌며 묏등에 올라 먼 산 바라보며 깊은 고뇌의 싹을 키우곤 했다. 각궁리(角弓里)에 있던 요산서재(樂山書齋)에 다니며 진동일(陳東一) 훈장님께 혼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배우던 한자의 묘리에 흠뻑 젖기도 했다. 할아버님은 늘 내 공부를 살피시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낭창낭창한 시누대로 종아리에 피멍이 들 때까지 맞곤 했다. 발로 꺾어두고 낙죽(烙竹)도 하고 매듭도 엮어 한 다발씩 서당에 보내면 서당에서도 맞았는데. 그래도 서당에 다니는 것이 좋았다.


▣ 소묘 둘

나는 지금 왜 지난 날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것일까? 과연 세간의 자성을 소유하고 살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아니지 살필 능력마저 없으니 그런 꿈을 꾸고 싶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함평에서 ‘약속의 땅’(강원도 탄광촌을 이르는 말. TV드라마의 이름으로 쓰인 뒤 탄광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북(舍北,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소읍.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가 있는 곳으로 지금은 광산 경기가 좋지 않아 쇠락한 동네가 되었고, 요즘은 카지노 개발로 들떠 있는 곳이다.)으로 전학을 갔다.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만 했다. 졸업을 앞두고 아버님이 사고를 당하시어 일류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린 나의 자존심은 소위 삼류학교 똥통학교라고 불리는데는 가지 못하게 했다. 덩치가 컸던 나는 세한 공업사라는 광산 철구조물(‘I’자 형 빔으로 채탄이나 굴진 굴을 파면서 동발<나무>을 세우기 앞서 빔으로 굴의 형태를 먼저 만드는 일이다. 아이 빔을 절단, 밴딩, 설치하는 일로 막장까지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제작회사에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 2년 열심히 하고 나니 세상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당구장으로 술집으로 마구 돌아다녔다. 이러는 것이 세상인 줄 알았다.

그 때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이 하늘색 교복을 입고 하얀 카라를 세우고 역에 내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날, 나는 퇴근하는 길의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여러 아이들 중 ‘정희’가 있었다. 중 2때 같은 반 친구인데, 강릉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대뜸 “너 왜 공부 안하니?”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머뭇 쭈뼛쭈뼛 서 있다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정희는 내가 그 뒤 군대생활을 할 때 쇠골이 나가 국군 현리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늘 공부하라고 만날 때마다 채근하시던 선생님 한 분(韓仁禮 선생님으로 중학교때 과학을 담당하셨는데, 지금은 익산 가까이에 계신다)이 나를 찾아 오셨다.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는 ‘이리(지금의 익산)’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해 두었다는 것이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야학(전북 익산에 있는 삼동야학. 그 뒤에 나는 이 야학에서 3년간 수학교사를 했다.)에 다녔다.

두달을 다닌 뒤에 검정고시를 보아 합격하고,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외지도를 하며 학비를 마련하고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80년대 초에 숱하게 쥐어 보았던 주먹에 울끈 솟는 민주의 열망은 최루가스에 면역이 생겨 가스를 범벅으로 뒤집어 쓰고도 태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는 군대에 끌려갔다.(어쩌면 끌려갔다는 표현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영장이 나와 어쩔 수 없이 갔으니 끌려간게고, 내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민주화의 물결속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갔다는 말도 된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미시령 고개 밑에 있는 특공연대였다. ‘머리에 든 것이 많은 놈은 굴러야 한다’며 내 몰던 고참들의 군화발에 채이면서 특공대의 오기와 악다구니로 버티며 여러 훈련을 마치고 모범사병(?)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제대후의 내 몸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폐결핵에 걸려있고, 간염, 천공성 십이지장궤양 등으로 고생을 했다. 제대후에 복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인가로 방황이 깊었다. 그 방황의 끝자락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 소묘 셋

지금까지 내 얘기만을 했는데 본 주제의 본령으로 접어들어야겠다.
흔히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현상들을 내 것으로 인식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다. 나 스스로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모습이 진실이고 전부인 것처럼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있으면 있어서 집착하고 없으면 없어서 괴로워한다. 인과의 이치를 무시하고 자행자지의 삶을 살고, 참된 공(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유무의 단견만을 쫓기 때문에 중도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 중도의 실상을 알지 못하니 여래의 실상도 알지 못한다. 여래의 실상을 모르니 여래의 자성이 바로 세간의 자성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중론>의 첫 귀경게(歸敬偈)에서 밝히고 있는 연기를 알지 못함이다.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찾아보면 시공을 뛰어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간의 모습을 봄(見)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유체계만을 인지하게 되며, 세간을 관(觀)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즉 이는 불변의 실체는 없지만 의식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이 부처님과 같다면 내가 바로 부처이다. 즉 깨달음의 세계에 있다면 내가 바로 부처인 것이다. 바로 내 삶을 통해서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처럼 열린 세계에서는 중도실상의 정견을 드러내어 지금까지 보고 듣고 깨달아 안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래와 세간의 관계가 자성의 유무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동안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면 자기 반성을 통해 공부를 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틀들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즉 모든 문제의 본질과 해결은 나와는 다른 사유의 구조속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켜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존재의 문제를 따질 때 연기의 구조속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지 ‘무엇’의 문제는 아님을 인식하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기론적 구조에서 파악하고 이 가운데 인과의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소묘 넷

어렵다. 무어라고 끄적이긴 했는데, 지난 날의 회상을 제외하고는 하늘 높이 뜬 느낌이다. 힘이 드니 어쩌겠나. 좀 쉬어가야겠다.

대흥사엘 갔다. <중론>을 함께 강독했던 벗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남도 땅을 한뼘 한뼘 밟아가는 재미가 솔솔하다. 들녘의 바쁜 농심을 뒤로 하고 가는게 못내 죄송스러웠지만, 삽삽한 바람결에 묻어오는 남도의 울뚝이는 힘과 연록빛 생채기가 상그롭다.

대흥사의 역사가 어떻고 堂宇들은 무에 있는지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다. 대웅전 뒤돌아 탱화를 담아놓는 긴 목조 관이 조상들의 예지에 기가 턱 막히게 했고, 추사 김정희가 쓴 無量壽殿 현판이 내게 어서 빨리 無量壽를 깨치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어! 그런데 당우들이 조금씩 건적거리듯 주춧돌은 제멋대로 놓여있고 그 위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건물이 어찌 그리 자연스러운지, 이리 꾸미고 저리 재보는 마음 눈에 끼인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다. 저녁 공양을 든 뒤에 돌아오는 길, 온 몸에 감도는 알싸한 향내가 오래도록 그림움에 젖게 한다.

하냥 잡고 있다고 해도 막연함은 여전하지 이제는 놓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중론> 27품의 모든 게를 읽고 또 읽어도 관여래품의 이 한 게가 확연하지 않다. 그저 희부연한 안개속을 걸어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깨달음의 길이 글자를 읽고 있다고 해서 밝아질 것인가? 그동안 불교를 공부한다고(<중론>을 강독하면서 이 말, 불교를 공부한다는 이 말이 얼마나 많은 모순을 담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불교는 결국 내가 해보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책을 보았는데, 깨달음의 마음으로 보지 않고 배움의 마음으로 보았다는 반성이 밀려든다.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존재, 깨달음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철저히 자각했을 때 바로 ‘여래가 소유한 자성은 바로 세간의 자성이고, 여래에게 자성이 없으니 세간도 역시 자성이 없다.’는 여래 실상의 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세세생생 여래 실상의 길을 찾아가리라.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덧붙임 : 예전에 불교의 위대한 고승 중의 한 분인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을 몇몇 지우와 강독한 적이 있다. 한 1년동안 매주 모여 진행된 공부였는데, 그 공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뭔가를 쓰고 싶었다. 위 글은 중론의 한 부분을 중심으로 중론의 전체적인 사유구조와 내 삶의 모습을 연결시켜 보고 싶었다.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게는 진행형인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