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108) - 고향집 풍경

자작나무숲이이원 2001. 11. 8. 17:11
오늘 그린 풍경화 - 고향집 풍경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 간 것은 아니고 영광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보았습니다. 봄이 되면 나비 축제로 유명한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 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오두마을이라는 이름은 동네 뒷산에 검은 바위가 진산(마을을 감싸는 봉우리)이 되어 마을을 굽어보는 형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한 30여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제가 그 시골길에서 자라던 때에는 100여호 가까이 되는 꽤나 큰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랫마을만 사람이 살고 제가 살던 고향집 위 고샅길은 모든 집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옛집을 찾아가는 길에 거웃 자란 쑥대와 도둑놈(옷에 붙는 풀이름)이 좁은 고샅을 덮고 있었습니다. 시골집은 본채와 사랑채, 창고까지 모두 세 채인데 본채의 한 구석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마루는 지금도 튼튼해서 한참을 앉아 장자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도내기를 돌아오는 햇살을 한참이나 맞고 앉아 있었습니다.

생리 현상으로 측간(화장실)에 갔더니 예전에 변기로 쓰던 큰항아리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항아리 가장자리에 앉아서 앞에 매어놓은 줄을 잡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그런 변기인데 어린 아이가 그 변기를 사용하기엔 여간 힘이 드는게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바닥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재를 뿌렸는데 그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항아리 변기에 앉아서 일을 보다가 좀 창피한 얘기이긴 하지만, 항아리에 빠진 기억이 있습니다. 말이 항아리이지, 옛말대로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할머님께서 옷을 다 벗기시고 집앞을 흐르던 함태골 물에 몇 시간을 씻고 또 씻어도 가시지 않던 냄새가 있었습니다. 사실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도 온 동네에 퍼져나간 소문의 냄새가 더 지독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왜, 구수하기가지 한 향내가 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입니다. 입가엔 웃음이 번지고 말입니다. 그 똥을 퍼서 만든 잿더미는 발효가 잘 되어 아주 좋은 거름이 되었는데 지금도 많은 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니, 6년전 돌아가신 나의 할머님 해진댁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지런한 해진댁은 그 거름을 온 밭에 흩뿌려 채전을 가꾸곤 하셨는데, 저 거름은 몇 년째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또 다른 시름에 겨워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마당에 녹아있는 햇살에 자란 풀과 섞여있는 콩 몇 포기도 아주 알이 튼실하게 영글어 여물어 있었습니다. 한참을 따 모았더니 세 홉 가량이 됩니다. 아마도 해진댁이 농사를 지으면서 마당에 베어 말린 뒤 도리깨질을 할 때 튀어나간 콩알 몇이 몇 해 동안 나고 자라 세 홉이나 된 모양입니다. 그 햇살을 오랫동안 맞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뭐라 말로 하기에는 힘들지만 야릇한 기분에 휩싸여 집벽을 돌아보다가 <통일벼 농사 짓는 집>이라는 표식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린 날 밥을 굶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맛있는 일반벼 쌀이 아니라 정부미나 통일벼 쌀이어서 배는 불렀지만 고실 고실한 밥맛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끼니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게 그 시절에 맛보는 행복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인스턴트 음식에 익숙해 있고, 밥 대신 방 등으로 간단하게 때우는 식사 습관에 쌀이 남아돌아 창고마다 가득 쌓여 썩어가고 있다는 뉴스와 경작비에도 못 미치는 쌀값 때문에 애타하는 농부들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집 옆 밭떼기에는 솔(부추)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상긋한 맛은 오랫동안 입안을 감돌고 마당 한 켠에 있는 빈 닭장에선 지금이라도 닭들이 홰를 치며 튀어 나올 듯 하고 작은 채 정지(부엌)에 가득한 나무들은 바스러지고 있었습니다. 살은 좀 쪘지만 매 끼니마다 맛있게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과 저녁에 뭘 먹을까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입니다.

얼굴에 미소를 띄고 주위를 둘러보니 흙벽이 많이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두꺼비집 아래 집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씨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할아버님께서 <七顚八起(칠전팔기)>라고 쓰신 글입니다. 지금도 그 글을 쓰시던 때가 또렷이 기억납니다.

제가 각궁리(집에서는 시오리길임)에 있는 <요산서재>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지 3년쯤 되었을 때 서당에 가기 싫은 마음이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당에 빠질까만을 고민하다가 꾀병도 앓고 중간에 땡땡이도 쳤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할아버님께서 먹을 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벽에다 <七顚八起>라고 쓰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니 마음에 하기 싫은 마음이 날 때, 그 마음을 이겨내야 한다. 몇 번이고 싸우고 또 싸워서 싸우지 않아도 될 때까지 이겨내야 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굉장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린 뒤부터는 그 시오리길 서당을 날아서 다녔습니다. 철 따라 바뀌는 도내기길에 마음을 빼앗겨 찔레 새순을 따먹고 멱도 감고 꽃무릇 꽃향에 취하여 해찰할 때도 있었지만 이 일이 있을 뒤론 서당에 가기 싫다고 땡땡이 친 적은 없었습니다. 이 때의 가르침은 대학 1학년 때 다리에 깁스를 하고 교내에서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도 수업 시간 한 번 늦지 않은 힘이 되었나봅니다.

벌써 30여년이나 지난 옛일이지만 명징하게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마도 할아버님의 사랑이 내가 자라는 동안 정신의 양식이 되어 제 온 몸 구석구석에 각인이 된 까닭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할아버님의 그 말씀을 자식들에게 해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늦은 가을날의 해는 참 일찍도 집니다. 마을 앞산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님 묘에서 뻐꾸기소리가 맑게 들려옵니다.


2001년 11월 8일
자작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