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01] 길을 묻거나 이름을 묻거나
▣옛 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道德經> 제 1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새 길▣
도라고 일컫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고, 이름으로 불려지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漢字工夫▣
道[ , 9] 길 도, 이치 도, 사상 도, 진리 도, 말할 도
非[非, 0] 아닐 비, 부정의 조사, 배반할 비
常[巾, 8] 항상 상, 법 상, 불변 상, 전법 상
▣산책 길▣
노자의 <道德經>을 읽는 코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성인이다. 이 말은 곧 노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 바 '없음'이라는 우리말로 옮겨지는 '무(無)'에 대한 이해이다. 無爲, 無知, 無欲, 無治 등으로 쓰이는 이 말의 실존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없다'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개념지을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다. 이 '없음'에 대한 인식의 반대가 '있음'인데, 이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화를 구분짓는 중요한 코드이다. 하지만 도덕경에서는 명확히 구분짓지 않는다. 다만 무위일 뿐이다. 다른 말이나 설명이 해석이 필요치 않다.
노자 1장은 노자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노자사상의 핵심이다. '道'라고 쓰여진 첫 글자와 '名'이라고 쓰여진 이 두 글자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나는 노자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게 아니고, 사실 그런 실력도 없기에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고 작지만 실천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산책길의 목적이다.
도는 쉽게 말해 '길'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진리의 가르침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큰길로 수많은 사람과 차가 지날 수 있는 것처럼 큰 도는 천하의 많은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도고, 작은 도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도의 현상은 사람의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의 현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도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길'이라고 약속한 곳은 누구나 다닐 수 있다. 물론 특정인만 다닐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 그러한 길은 위에서 말한 작은 길이다. 큰길은 다닐 수 있는 사람, 다닐 수 없는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다님'과 '다니지 않음'이라고 하는 행위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도덕경> 14장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고 이름지어 본다."(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는 내용이 보인다.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이라는 선가의 어록에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비었으되 비지 않고, 있되 있지 않다"(視之不見 聽之不聞 空而不空 有而非有)는 내용이 보인다. <중용(中庸)> 16장에는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되,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내용이 보인다. 위 내용에서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하다. 보고 듣고 말하고 잡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곧 바로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흔히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보았다 하고, 제대로 듣지도 않고 들었다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자세를 지향해야 하는가? "보고 보고 또 보아도 보지 않아도 보며, 듣고 듣고 또 들어서 듣지 않아도 들으며, 하고 하고 또 하여 하지 않아도 하는" 그야말로 온몸과 온마음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무위는 "하지 않음"이 아니라, "죽을 곳에서 죽지 않고 죽도록 일하는 것"이며, 무지는 "앎의 물 속에서 스펀지처럼 빨아드리되, 그 앎에 녹지 않고 내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 1장의 가르침은 이어진다.
무명은 하늘땅의 비롯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가려짐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한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르니
같이 현묘하다 이른다.
현묘하고 현묘한 것이여.
뭇 현묘함의 문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 此兩者同出而異名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만, 곧바로 알려고 하지 말자.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세계가 아니다. 그저 가끔 소가 되새김질하듯 마음에 불러 몸으로 곱씹어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이름의 '있음'과 '없음'을 따지지 않는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단지 욕심의 있고 없음으로 '오묘함'과 '가려짐'을 보는 것이다. 이 것이 쌓이고 쌓여서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문명사회의 한 면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정신문명이 함께 성숙하지 못하여 온갖 모습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철학이 없고 종교가 없고 인물이 없어서 온갖 전쟁과 굶주림과 반도덕적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실천이 없고, 종교의 실천이 없고, 인물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 등 이론의 세계가 가지는 한계는 실천적 깨달음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실천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이론의 벽은 실천이고 실천의 벽은 상(相, 무슨 일을 했다고 여기는 마음, 즉 유위의 마음이다.)이다. 상은 없앨 대상이 아니라, 원래 없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이쯤에서 작은 결론을 하나 맺고자 한다. 도덕경 1장 끝에 '뭇 현묘함의 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문의 의미에 주목하고자 한다. 문은 자신의 힘과 타인의 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점으로, 만남의 시작이다. 문의 전제는 집이다. 내 집의 문은 내가 열고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집의 문은 열어줘야 들어간다. 이를 내 힘과 남의 힘 즉, 자력과 타력을 아울러 닦는 깨달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참 도가 되고 참 이름이 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는 도라 이름한 도 아님이 얼마나 많고, 이름을 가졌어도 이름값 하지 못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옛 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道德經> 제 1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새 길▣
도라고 일컫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고, 이름으로 불려지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漢字工夫▣
道[ , 9] 길 도, 이치 도, 사상 도, 진리 도, 말할 도
非[非, 0] 아닐 비, 부정의 조사, 배반할 비
常[巾, 8] 항상 상, 법 상, 불변 상, 전법 상
▣산책 길▣
노자의 <道德經>을 읽는 코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성인이다. 이 말은 곧 노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 바 '없음'이라는 우리말로 옮겨지는 '무(無)'에 대한 이해이다. 無爲, 無知, 無欲, 無治 등으로 쓰이는 이 말의 실존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없다'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개념지을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다. 이 '없음'에 대한 인식의 반대가 '있음'인데, 이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화를 구분짓는 중요한 코드이다. 하지만 도덕경에서는 명확히 구분짓지 않는다. 다만 무위일 뿐이다. 다른 말이나 설명이 해석이 필요치 않다.
노자 1장은 노자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노자사상의 핵심이다. '道'라고 쓰여진 첫 글자와 '名'이라고 쓰여진 이 두 글자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나는 노자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게 아니고, 사실 그런 실력도 없기에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고 작지만 실천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산책길의 목적이다.
도는 쉽게 말해 '길'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진리의 가르침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큰길로 수많은 사람과 차가 지날 수 있는 것처럼 큰 도는 천하의 많은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도고, 작은 도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도의 현상은 사람의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의 현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도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길'이라고 약속한 곳은 누구나 다닐 수 있다. 물론 특정인만 다닐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 그러한 길은 위에서 말한 작은 길이다. 큰길은 다닐 수 있는 사람, 다닐 수 없는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다님'과 '다니지 않음'이라고 하는 행위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도덕경> 14장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고 이름지어 본다."(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는 내용이 보인다.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이라는 선가의 어록에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비었으되 비지 않고, 있되 있지 않다"(視之不見 聽之不聞 空而不空 有而非有)는 내용이 보인다. <중용(中庸)> 16장에는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되,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내용이 보인다. 위 내용에서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하다. 보고 듣고 말하고 잡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곧 바로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흔히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보았다 하고, 제대로 듣지도 않고 들었다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자세를 지향해야 하는가? "보고 보고 또 보아도 보지 않아도 보며, 듣고 듣고 또 들어서 듣지 않아도 들으며, 하고 하고 또 하여 하지 않아도 하는" 그야말로 온몸과 온마음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무위는 "하지 않음"이 아니라, "죽을 곳에서 죽지 않고 죽도록 일하는 것"이며, 무지는 "앎의 물 속에서 스펀지처럼 빨아드리되, 그 앎에 녹지 않고 내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 1장의 가르침은 이어진다.
무명은 하늘땅의 비롯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가려짐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한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르니
같이 현묘하다 이른다.
현묘하고 현묘한 것이여.
뭇 현묘함의 문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 此兩者同出而異名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만, 곧바로 알려고 하지 말자.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세계가 아니다. 그저 가끔 소가 되새김질하듯 마음에 불러 몸으로 곱씹어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이름의 '있음'과 '없음'을 따지지 않는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단지 욕심의 있고 없음으로 '오묘함'과 '가려짐'을 보는 것이다. 이 것이 쌓이고 쌓여서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문명사회의 한 면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정신문명이 함께 성숙하지 못하여 온갖 모습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철학이 없고 종교가 없고 인물이 없어서 온갖 전쟁과 굶주림과 반도덕적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실천이 없고, 종교의 실천이 없고, 인물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 등 이론의 세계가 가지는 한계는 실천적 깨달음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실천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이론의 벽은 실천이고 실천의 벽은 상(相, 무슨 일을 했다고 여기는 마음, 즉 유위의 마음이다.)이다. 상은 없앨 대상이 아니라, 원래 없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이쯤에서 작은 결론을 하나 맺고자 한다. 도덕경 1장 끝에 '뭇 현묘함의 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문의 의미에 주목하고자 한다. 문은 자신의 힘과 타인의 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점으로, 만남의 시작이다. 문의 전제는 집이다. 내 집의 문은 내가 열고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집의 문은 열어줘야 들어간다. 이를 내 힘과 남의 힘 즉, 자력과 타력을 아울러 닦는 깨달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참 도가 되고 참 이름이 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는 도라 이름한 도 아님이 얼마나 많고, 이름을 가졌어도 이름값 하지 못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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