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겨울산 하늘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2. 29. 00:17
겨울산 하늘





온전하게 맡기지 않고는

온전하게 찾을 수 없는

천년만년 빙벽에 잠든 그리움

해동(解凍)을 기다리다 한 생이 가고

극미(極微)의 기억을 더듬다 만난

한 사람이 내게 있다



늘 낯선 길을 찾아

피만 투석하는 게 아니라

아리송한 기억들을 걸러내면

더 살가운 인연이 되고

굼뜬 눈빛에 눈꼽이 끼면

더 그리운 사람이 되는지



태초, 땅의 모습을 뚫고 선

저 우람한 바위들도

저 여린 눈꽃의 쓰다듬이 없다면

그리 쉽게 세월의 풍화를

이기진 못했을건데

바람이 어루만진 자리

세월 스민 이끼가 끼고

햇살이 비친 틈자리에

풀 한포기 키운다



체온을 식혀 꽛꽛하게 죽는 줄 알았는데

이 불인(不忍)의 혹한에도 땀이 솟는 건

아직은 살아야 할 때라는 건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건지

억겁 전생의 빚을 갚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 하나는

겨울산 하늘이 눈부시다는 것이다.



★시작노트★

다 뺏을려면 다 주는 법이다. 다 줄려면 다 뺏는 법이기도 하다. 자연의 변화를 보면"망설임"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순간을 가장 치열하게 사는 것이 바로 자연의 모습이다.

그 안에서 살면서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닌지, 한 겨울이 되면 더 쉽게 깨달음을 얻는 것 같다. 가진게 단순하고 모두 다 벗은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 더 의연하고 당당한 바위, 풀 한 포기를 보면서 내가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고, 깨달았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가끔, 겨울산이 하늘이 눈부신 것 만으로도 이 겨울이 행복하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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