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창의성이라는 말의 의미, 둘
▣ 문화 이야기 - 라면에서 오락실까지.
문화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젖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가 인위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문화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안목 지수를 높이려다가 오히려 우리 문화에 대한 오해를 낳고 때론 편견과 오만에 쌓이게 한 경우를 많이 보곤한다.
몇 해전 가을(1999. 10월)에 솜탐이라는 태국 친구가 나를 찾아 익산에 오면서 조그마한 가방 하나와 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다. 라면의 크기가 얼마나 앙증맞고 맛있어 보이던지 한 번 끓여 먹기로 했다. 끓여놓고 보니 우리의 ‘신라면’ 비슷한 국물색에 면발은 컵라면 면발같았다. 한 마디로 맛있어 보였다. 몇이 앉아서 함께 먹는데 맛이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솜탐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튿날 우리 나라 라면 몇 가지를 사서 끓였다. 이번엔 솜탐이 국물맛에 조금 고개를 내두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라면에 대한 입맛도 ‘젖어 익은’ 상태의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은 것은 고개를 갸웃 거리게 만드는 것이 문화이다. 하지만 난 그 태국 라면을 잘 먹었다. 먹을수록 묘한 맛이 났다. 꺼슬한 태국의 날씨와 푸켓 해변의 에머랄드 빛 바다색이 느껴졌다면 너무 감성적인 내 마음 탓일까.
우리는 흔히 석굴암의 불상을 보고 그 미소에 넋이 나간다. 나도 예닐곱 차례 경주에 가서 불상을 보면서 그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아니다. 문화를 말하면서 ‘세계화’를 부르짖은게 그리 멀지 않은 시간전의 일이다. 문화의 세계화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고 쓰는 경우를 난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현대화라는 말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한다는 것, 이 시대의 삶에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 전통의 현대화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전통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인 전통이 사라져 버리고 국적불명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작금(昨今)의 현실이다.
요즘 아이들은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 바둑 학원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학원을 다니고 있다.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아이들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등 정규 교과과정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여러 ‘문화’들을 접하는 다양한 기제가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 문화는 ‘즐김’의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 전통의 문화는 함께 하는 것이다. 서양의 그것이 다분히 ‘쑈(show)'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우리의 문화는 ’마당‘의 함께 함이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공간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은 갈수록 제한하면서 새로운 문화는 좀 더 많이 접하고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는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들의 방과후 활동은 일단 다양한 경험의 차원으로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형편이 닿는다면 정말 스트레스 받지 않을 때까지 하게 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만 두게 하자. 예체능 교육은 ‘문화적 젖음’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 어느 순간의 투자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을 하여 IMF 사태라는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린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준 것이 사실이다. 박 선수의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스파르타식으로 골프를 시켰다고 말하자,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골프장으로 내몰아 ‘젖게’ 하였는데, 정작 젖어야 할 데는 젖지 않고, 마음만 흠뻑 젖었으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좀 다른 얘기를 해 보자.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선’의 미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는 편안함과 저 한없는 우주로 끝없는 팽창의 정점(頂點)인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도 한다. 어쩌면 그렇게 긴장과 이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선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우리 나라 고건축에 대한 몇 가지의 책을 보았는데, 그 선의 비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의 화두였다. 넋을 빼놓고 보면서 말이다.
그 의문이 몇해전 가을 남원 운봉에 있으면서 풀렸다. 기와를 올려야 할 양끝을 연결하는 엄지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새끼줄로 그 길이를 잰 뒤에 물에 푹 젖게 한 뒤에 다시 그 양끝을 잡으면 물의 무게에 못이긴 새끼줄이 축 처지는 선이 바로 기와의 선이 되었다. 그 단순하고 간단 명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하루 아침에 찾아진 것이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 오락실에 가서 한 것이 자동차 경주 게임과 벽돌깨기였다. 하지만 요즘 오락실에는 이름도 모르는 갖가지의 오락기들이 첨단 스테레오 음을 내며 현란한 손놀림과 발놀림을 통해 저 너른 우주로 나는 듯한 환상 여행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하여 지구 저 건너편의 사람과도 온라인을 통한 게임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지 궁금하게 지켜보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한 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 시간 과제로 돈 2천원을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한 뒤에 소감을 쓰고, 오락을 잘 하는 아이 인터뷰까지 하는 과제였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막막할 수가. 내가 아는 게임이 있나, 아니면 어떤 틀을 정해서 하는 과제가 아니었는데, 역시 숙제는 어려운가 보다. 어떻게 해왔나 기다려 봐야지. 난 별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 창의성을 위한 전제
자녀의 창의성 계발을 위해 경제적,시간적인 투자와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그 과정에 대한 신경보다는 결과에 더 많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창의성 계발을 위해 많은 명언과 가언(嘉言)이 있지만, 몇 말 더하고 싶은 까닭은 앞서 말한 ‘문화적인 창의성’이라는 명제에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예전에는 거시적으로 경제를 분석하면서 완전고용, 가격안정, 경제성장, 균등한 소득분배 등이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업들의 경영환경으로서의 ‘문화 마인드’에 얼마만큼의 센스가 있느냐에 따라 기업의 가치가 달라지는 세상이다. 우리나라에만 보더라도 1등과 2등을 다투는 여러 기업들이 있다. ‘맛나’와 ‘다시다’, ‘칠성 사이다’와 ‘킨 사이다’, ‘오비 맥주’와 ‘하이트 맥주’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문화적인 마인드로서 하이트 맥주를 살펴보자. 하이트 맥주는 낙동강 페놀 오염 등으로 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질 때, 150미터 암반의 천연수로 만들었다는 카피와 암반을 솟구쳐 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로 전 국민의 갈증을 풀어준 맥주이다. 회사 이름도 하이트 맥주로 바꿀 정도로 하이트의 대중적 인기는 지금도 대단하다.
지금의 사회도 그렇지만 앞으로 21세기를 짊어지고 갈 우리의 아이들 시대에는 ‘문화적인 창의성’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준비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는 행동하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창의성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움직임’이다. 동적이라는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제한된 공간과 시간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늘리고 공간을 넓히는 과정속에서 나오는 창의성이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말이다. 시간을 늘린다는 말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공감적 시간을 늘리라는 의미이고,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관계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둘째는 관계하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天上天下에 唯我獨尊’이라 하셨고, 예수님은 ‘獨生子’라는 말로 독립적 존재의 우월절 가치를 말하고 있다. 종교적 가치 개념 속에서는 다르게 해석되겠지만, 인간의 관계성으로 보면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긍정적인 관계를 다양하게 확보한다면 그 창의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고 보람을 주게 될 것이다. 독단적이고 비논리적인 창의성은 이미 창의성이 아니라는 아님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셋째는 모험적인 창의성이어야 한다. 벤처(venture)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도전정신을 뜻한다. 흔히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수 많은 실패를 통해 하나의 성공이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기 위해 수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전구는 훨씬 뒤에야 우리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창의성은 행동성(行動性), 관계성(關係性), 모험성(冒險性)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일회적이고 독단적인 죽어있는 낡은 생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창의성인가에 대한 물음에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세 속성을 모두 갖추고 창의성을 계발하는 방법을 또 물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나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의성은 어떤 일에 미칠 수 있는 바탕’이라는 점이고, 나와는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나와 밀접한 실체라는 점이다. 그러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이 이미 창의성이다. 지난 시간에는 자장면을 먹었으니 오늘은 라면을 먹을까.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 문화 이야기 - 라면에서 오락실까지.
문화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젖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가 인위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문화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안목 지수를 높이려다가 오히려 우리 문화에 대한 오해를 낳고 때론 편견과 오만에 쌓이게 한 경우를 많이 보곤한다.
몇 해전 가을(1999. 10월)에 솜탐이라는 태국 친구가 나를 찾아 익산에 오면서 조그마한 가방 하나와 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다. 라면의 크기가 얼마나 앙증맞고 맛있어 보이던지 한 번 끓여 먹기로 했다. 끓여놓고 보니 우리의 ‘신라면’ 비슷한 국물색에 면발은 컵라면 면발같았다. 한 마디로 맛있어 보였다. 몇이 앉아서 함께 먹는데 맛이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솜탐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튿날 우리 나라 라면 몇 가지를 사서 끓였다. 이번엔 솜탐이 국물맛에 조금 고개를 내두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라면에 대한 입맛도 ‘젖어 익은’ 상태의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은 것은 고개를 갸웃 거리게 만드는 것이 문화이다. 하지만 난 그 태국 라면을 잘 먹었다. 먹을수록 묘한 맛이 났다. 꺼슬한 태국의 날씨와 푸켓 해변의 에머랄드 빛 바다색이 느껴졌다면 너무 감성적인 내 마음 탓일까.
우리는 흔히 석굴암의 불상을 보고 그 미소에 넋이 나간다. 나도 예닐곱 차례 경주에 가서 불상을 보면서 그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아니다. 문화를 말하면서 ‘세계화’를 부르짖은게 그리 멀지 않은 시간전의 일이다. 문화의 세계화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고 쓰는 경우를 난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현대화라는 말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한다는 것, 이 시대의 삶에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 전통의 현대화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전통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인 전통이 사라져 버리고 국적불명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작금(昨今)의 현실이다.
요즘 아이들은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 바둑 학원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학원을 다니고 있다.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아이들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등 정규 교과과정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여러 ‘문화’들을 접하는 다양한 기제가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 문화는 ‘즐김’의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 전통의 문화는 함께 하는 것이다. 서양의 그것이 다분히 ‘쑈(show)'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우리의 문화는 ’마당‘의 함께 함이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공간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은 갈수록 제한하면서 새로운 문화는 좀 더 많이 접하고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는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들의 방과후 활동은 일단 다양한 경험의 차원으로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형편이 닿는다면 정말 스트레스 받지 않을 때까지 하게 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만 두게 하자. 예체능 교육은 ‘문화적 젖음’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 어느 순간의 투자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을 하여 IMF 사태라는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린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준 것이 사실이다. 박 선수의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스파르타식으로 골프를 시켰다고 말하자,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골프장으로 내몰아 ‘젖게’ 하였는데, 정작 젖어야 할 데는 젖지 않고, 마음만 흠뻑 젖었으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좀 다른 얘기를 해 보자.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선’의 미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는 편안함과 저 한없는 우주로 끝없는 팽창의 정점(頂點)인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도 한다. 어쩌면 그렇게 긴장과 이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선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우리 나라 고건축에 대한 몇 가지의 책을 보았는데, 그 선의 비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의 화두였다. 넋을 빼놓고 보면서 말이다.
그 의문이 몇해전 가을 남원 운봉에 있으면서 풀렸다. 기와를 올려야 할 양끝을 연결하는 엄지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새끼줄로 그 길이를 잰 뒤에 물에 푹 젖게 한 뒤에 다시 그 양끝을 잡으면 물의 무게에 못이긴 새끼줄이 축 처지는 선이 바로 기와의 선이 되었다. 그 단순하고 간단 명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하루 아침에 찾아진 것이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 오락실에 가서 한 것이 자동차 경주 게임과 벽돌깨기였다. 하지만 요즘 오락실에는 이름도 모르는 갖가지의 오락기들이 첨단 스테레오 음을 내며 현란한 손놀림과 발놀림을 통해 저 너른 우주로 나는 듯한 환상 여행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하여 지구 저 건너편의 사람과도 온라인을 통한 게임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지 궁금하게 지켜보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한 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 시간 과제로 돈 2천원을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한 뒤에 소감을 쓰고, 오락을 잘 하는 아이 인터뷰까지 하는 과제였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막막할 수가. 내가 아는 게임이 있나, 아니면 어떤 틀을 정해서 하는 과제가 아니었는데, 역시 숙제는 어려운가 보다. 어떻게 해왔나 기다려 봐야지. 난 별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 창의성을 위한 전제
자녀의 창의성 계발을 위해 경제적,시간적인 투자와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그 과정에 대한 신경보다는 결과에 더 많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창의성 계발을 위해 많은 명언과 가언(嘉言)이 있지만, 몇 말 더하고 싶은 까닭은 앞서 말한 ‘문화적인 창의성’이라는 명제에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예전에는 거시적으로 경제를 분석하면서 완전고용, 가격안정, 경제성장, 균등한 소득분배 등이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업들의 경영환경으로서의 ‘문화 마인드’에 얼마만큼의 센스가 있느냐에 따라 기업의 가치가 달라지는 세상이다. 우리나라에만 보더라도 1등과 2등을 다투는 여러 기업들이 있다. ‘맛나’와 ‘다시다’, ‘칠성 사이다’와 ‘킨 사이다’, ‘오비 맥주’와 ‘하이트 맥주’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문화적인 마인드로서 하이트 맥주를 살펴보자. 하이트 맥주는 낙동강 페놀 오염 등으로 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질 때, 150미터 암반의 천연수로 만들었다는 카피와 암반을 솟구쳐 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로 전 국민의 갈증을 풀어준 맥주이다. 회사 이름도 하이트 맥주로 바꿀 정도로 하이트의 대중적 인기는 지금도 대단하다.
지금의 사회도 그렇지만 앞으로 21세기를 짊어지고 갈 우리의 아이들 시대에는 ‘문화적인 창의성’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준비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는 행동하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창의성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움직임’이다. 동적이라는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제한된 공간과 시간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늘리고 공간을 넓히는 과정속에서 나오는 창의성이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말이다. 시간을 늘린다는 말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공감적 시간을 늘리라는 의미이고,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관계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둘째는 관계하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天上天下에 唯我獨尊’이라 하셨고, 예수님은 ‘獨生子’라는 말로 독립적 존재의 우월절 가치를 말하고 있다. 종교적 가치 개념 속에서는 다르게 해석되겠지만, 인간의 관계성으로 보면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긍정적인 관계를 다양하게 확보한다면 그 창의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고 보람을 주게 될 것이다. 독단적이고 비논리적인 창의성은 이미 창의성이 아니라는 아님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셋째는 모험적인 창의성이어야 한다. 벤처(venture)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도전정신을 뜻한다. 흔히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수 많은 실패를 통해 하나의 성공이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기 위해 수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전구는 훨씬 뒤에야 우리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창의성은 행동성(行動性), 관계성(關係性), 모험성(冒險性)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일회적이고 독단적인 죽어있는 낡은 생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창의성인가에 대한 물음에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세 속성을 모두 갖추고 창의성을 계발하는 방법을 또 물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나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의성은 어떤 일에 미칠 수 있는 바탕’이라는 점이고, 나와는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나와 밀접한 실체라는 점이다. 그러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이 이미 창의성이다. 지난 시간에는 자장면을 먹었으니 오늘은 라면을 먹을까.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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