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21세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어쩌다 지금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얼굴에 실풋 미소를 지어본다. 수많은 스승님들이 내 생의 자양분이 되어 썩어주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는 것 같다.
함께 공부한 벗 몇이 모여 스승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뭘 사 갈까 고민을 했지만,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는 스승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래도 빈손일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를 챙기긴 했다.
스승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다. 손수 정원의 나무를 가꾸시고, 마당의 풀도 뽑으시고, 청소를 하신다. 저희들 몫이라며 달라 해도, “내가 할란다” 이 한 마디 남기시고 묵묵히 당신 일을 하신다. 큰 절을 올렸다. 얼굴 가득 미소가 머무신다. 벗들과 준비한 선물을 올렸다. 작은 꽃 바구니 하나, 거절하진 않으신다. 함께 노래를 불러드렸다. 떼쓰며 공부할 때 불렀던 여러 곡을 목청껏 소리 높여 불렀다. 연로하신 스승님도 간간히 따라 부르시며 흐뭇해 하신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을 올렸다. 그 동안 어떻게 공부했는지 자상하게 보고하는 일이다. 학교 다닐 때처럼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어떻게 줄맞는 공부를 했는지, 다른 길로 빠지지는 않았는지 조곤조곤 아기새가 어미새에게 보채듯이 말씀드리면 하나하나 감정을 해주신다. 잘 잘못과 공부길의 방향로를 분명하게 짚어주신다. 그러시고는 당신이 준비하신 요구르트 한 병과 작은 가락엿 하나를 주신다. 목마름이 가시고 배가 부르다.
어제(5월 14일) 퇴근 무렵의 일이다. 중년의 남자 한분이 음료수와 화분 하나를 들고 오길래, 손님이겠거니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내게 ‘선생님’하며 인사를 넙죽한다. 벌써 10여년고 훨씬 지난 일인데, 야학에서 선생 노릇할 때 가르쳤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택시 운전수였는데, 꼭 수업시간 늦게 와서, 그것도 술에 거나해져서 수업분위기를 흐려놓곤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되자 내 인내도 한계에 이르렀다.
몽둥이를 두개 준비했다. 야학 교실은 4층 건물의 지하실이다. 음습한 냉기가 묻어 올라오는 2월의 밤이었다. 그 학생은 그날도 여전히 술에 잔뜩 취해 교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왜 나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오라고 했더니 순순히 나왔다. 책상위에 올라가라고 하여 종아리가 터지도록 때려주었다.
나머지 몽둥이 하나로는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나를 때리라고 했다. 속으로는 설마 했는데, 역시나 사정없이 나를 쳤다. 무엇이 쌓였을까 싶을 정도로 몽둥이 끝이 매서웠다. 내 종아리도 피가 터졌다.
학생들도 말리고 다른 선생님도 말렸지만, 내 오기와 늙은 학생의 술기운이 만나 한바탕 걸판진 굿을 벌렸다. 둘이 피가 터지자, 서로 부여안고 울다가 그날의 수업을 끝냈다. 안티푸라민을 겹겹이 발랐지만, 쓰라리기는 매 한가지였다. 종아리 쓰린 것도 쓰린 것이었지만, 마음은 더 쓰려왔다. 수업 마치면 들르곤 하던 대폿집에 가서 모두 곤죽이 되도록 마셨는데, 술은 취하지 않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다음날부터 수업분위기가 달라졌다. 늙은 학생은 교대 근무라 매일 나오지는 못했지만, 수업에 나오는 날은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야학 학생들은 해마다 두 차례 4월과 8월에 검정고시를 본다. 그 해 4월 검시에서 수학을 전부 합격했다. 수학은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 가운데 하나인데도 말이다.
그 늙은 학생과 뒤에 만날 일이 있어 왜 술 먹고 학교에 왔는지를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저녁에 만나뵙기로 한 선생님과는 연락이 되질 않는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연락이 되어 아이들 데리고 다녀왔다. 아내가 카네이션을 만들고 선물도 준비했다. 선생님 아이들은 배내짓 할 때 보아서인지 지금 고3, 고1의 다 큰 처녀들이지만, 여전히 내겐 꼬맹이로 남아있고, 아이들은 내가 군생활 할 때 봐서인지 아직도 군인삼촌으로 남아있다.
둘째 민수는 처음 보는 바이올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지구본과 돋보기 등에 정신이 팔려놀았다. 민성이는 어린이집 내준 숙제를 하지 못해 졸린 눈을 비비며 연필을 잡고 있다.
너무 오랜만에 뵌 선생님은 그새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많은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훈훈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나도 어느 새 선생 소릴 듣고, 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난 과연 선생 소리 듣고 아버지 소리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되돌아본다. 늦은 저녁 시간에 몇 가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스승이 되어 가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우선은 지도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가져야겠다. 어른이 되고 스승이 되고 어버이가 되어 지도 받는 사람보다 삶의 경륜이나 지혜가 그 보다 못하다면 참 어른일 수 없고, 참 스승일 수 없고, 참 어버이일수 없다. 나이만 어른이라고 해서 어른인 것은 아니다.
다음은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지 말아야겠다. 우리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지도자가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었기 때문이다. 돈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이 신용을 잃지 않는 건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신용을 잃어버린다. 신용은 “내가 저 사람을 쓸 수 있을까?”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음은 지도받는 사람에게 사리(私利)를 취하지 않아야 한다. 사리를 취하게 되면 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그 부정한 돈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탁해졌는가. 왜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지, 누리는 자가 더 누리려고 하는지. 인간의 탐욕은 정말 끝이 없는가.
고건 서울시장 아버님이 청송 고형곤(聽松 高亨坤)옹이다. 공직에 있는 아들에게 ‘돈에 깨끗하라’고 말했고, 아들은 그 말을 지키고 있다. 수없이 많은 공직자들이 명예롭지 못하게 된 그 가운데 돈이 있다. 사리사욕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지도인은 무슨 일을 하거나 “앎”과 “실천”을 대조해야 한다. 앎이 앎으로만 끝나면 그것은 죽은 앎이다. 실천하는 앎만이 진정한 앎이다. 앎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이고 스승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도자의 길을 가고, 지도자에게 배우며 산다. 참 스승이 없다고 한다. 내가 참 스승이 되면 안 될까.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어쩌다 지금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얼굴에 실풋 미소를 지어본다. 수많은 스승님들이 내 생의 자양분이 되어 썩어주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는 것 같다.
함께 공부한 벗 몇이 모여 스승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뭘 사 갈까 고민을 했지만,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는 스승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래도 빈손일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를 챙기긴 했다.
스승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다. 손수 정원의 나무를 가꾸시고, 마당의 풀도 뽑으시고, 청소를 하신다. 저희들 몫이라며 달라 해도, “내가 할란다” 이 한 마디 남기시고 묵묵히 당신 일을 하신다. 큰 절을 올렸다. 얼굴 가득 미소가 머무신다. 벗들과 준비한 선물을 올렸다. 작은 꽃 바구니 하나, 거절하진 않으신다. 함께 노래를 불러드렸다. 떼쓰며 공부할 때 불렀던 여러 곡을 목청껏 소리 높여 불렀다. 연로하신 스승님도 간간히 따라 부르시며 흐뭇해 하신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을 올렸다. 그 동안 어떻게 공부했는지 자상하게 보고하는 일이다. 학교 다닐 때처럼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어떻게 줄맞는 공부를 했는지, 다른 길로 빠지지는 않았는지 조곤조곤 아기새가 어미새에게 보채듯이 말씀드리면 하나하나 감정을 해주신다. 잘 잘못과 공부길의 방향로를 분명하게 짚어주신다. 그러시고는 당신이 준비하신 요구르트 한 병과 작은 가락엿 하나를 주신다. 목마름이 가시고 배가 부르다.
어제(5월 14일) 퇴근 무렵의 일이다. 중년의 남자 한분이 음료수와 화분 하나를 들고 오길래, 손님이겠거니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내게 ‘선생님’하며 인사를 넙죽한다. 벌써 10여년고 훨씬 지난 일인데, 야학에서 선생 노릇할 때 가르쳤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택시 운전수였는데, 꼭 수업시간 늦게 와서, 그것도 술에 거나해져서 수업분위기를 흐려놓곤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되자 내 인내도 한계에 이르렀다.
몽둥이를 두개 준비했다. 야학 교실은 4층 건물의 지하실이다. 음습한 냉기가 묻어 올라오는 2월의 밤이었다. 그 학생은 그날도 여전히 술에 잔뜩 취해 교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왜 나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오라고 했더니 순순히 나왔다. 책상위에 올라가라고 하여 종아리가 터지도록 때려주었다.
나머지 몽둥이 하나로는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나를 때리라고 했다. 속으로는 설마 했는데, 역시나 사정없이 나를 쳤다. 무엇이 쌓였을까 싶을 정도로 몽둥이 끝이 매서웠다. 내 종아리도 피가 터졌다.
학생들도 말리고 다른 선생님도 말렸지만, 내 오기와 늙은 학생의 술기운이 만나 한바탕 걸판진 굿을 벌렸다. 둘이 피가 터지자, 서로 부여안고 울다가 그날의 수업을 끝냈다. 안티푸라민을 겹겹이 발랐지만, 쓰라리기는 매 한가지였다. 종아리 쓰린 것도 쓰린 것이었지만, 마음은 더 쓰려왔다. 수업 마치면 들르곤 하던 대폿집에 가서 모두 곤죽이 되도록 마셨는데, 술은 취하지 않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다음날부터 수업분위기가 달라졌다. 늙은 학생은 교대 근무라 매일 나오지는 못했지만, 수업에 나오는 날은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야학 학생들은 해마다 두 차례 4월과 8월에 검정고시를 본다. 그 해 4월 검시에서 수학을 전부 합격했다. 수학은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 가운데 하나인데도 말이다.
그 늙은 학생과 뒤에 만날 일이 있어 왜 술 먹고 학교에 왔는지를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저녁에 만나뵙기로 한 선생님과는 연락이 되질 않는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연락이 되어 아이들 데리고 다녀왔다. 아내가 카네이션을 만들고 선물도 준비했다. 선생님 아이들은 배내짓 할 때 보아서인지 지금 고3, 고1의 다 큰 처녀들이지만, 여전히 내겐 꼬맹이로 남아있고, 아이들은 내가 군생활 할 때 봐서인지 아직도 군인삼촌으로 남아있다.
둘째 민수는 처음 보는 바이올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지구본과 돋보기 등에 정신이 팔려놀았다. 민성이는 어린이집 내준 숙제를 하지 못해 졸린 눈을 비비며 연필을 잡고 있다.
너무 오랜만에 뵌 선생님은 그새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많은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훈훈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나도 어느 새 선생 소릴 듣고, 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난 과연 선생 소리 듣고 아버지 소리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되돌아본다. 늦은 저녁 시간에 몇 가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스승이 되어 가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우선은 지도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가져야겠다. 어른이 되고 스승이 되고 어버이가 되어 지도 받는 사람보다 삶의 경륜이나 지혜가 그 보다 못하다면 참 어른일 수 없고, 참 스승일 수 없고, 참 어버이일수 없다. 나이만 어른이라고 해서 어른인 것은 아니다.
다음은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지 말아야겠다. 우리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지도자가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었기 때문이다. 돈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이 신용을 잃지 않는 건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신용을 잃어버린다. 신용은 “내가 저 사람을 쓸 수 있을까?”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음은 지도받는 사람에게 사리(私利)를 취하지 않아야 한다. 사리를 취하게 되면 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그 부정한 돈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탁해졌는가. 왜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지, 누리는 자가 더 누리려고 하는지. 인간의 탐욕은 정말 끝이 없는가.
고건 서울시장 아버님이 청송 고형곤(聽松 高亨坤)옹이다. 공직에 있는 아들에게 ‘돈에 깨끗하라’고 말했고, 아들은 그 말을 지키고 있다. 수없이 많은 공직자들이 명예롭지 못하게 된 그 가운데 돈이 있다. 사리사욕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지도인은 무슨 일을 하거나 “앎”과 “실천”을 대조해야 한다. 앎이 앎으로만 끝나면 그것은 죽은 앎이다. 실천하는 앎만이 진정한 앎이다. 앎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이고 스승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도자의 길을 가고, 지도자에게 배우며 산다. 참 스승이 없다고 한다. 내가 참 스승이 되면 안 될까.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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