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다름'과 '이웃'
이른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립니다. 몇 잎 남지 않은 은행잎들은 마지막 춤을 추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듯 촉촉 젖고 있습니다. 백양사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노란빛에 취하여 그냥 저대로 바람에 흩날리게 내버려두기 아쉬워 고운 잎들을 모아 차안에 깔았습니다. 은행잎에선 알큼하고 아릿한 냄새가 납니다. 가을을 아쉬워하는 냄새 같기도 하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냄새 같기도 합니다. 차에 처음 탄 지인이 "너는 못말린다니까!!"라며 비웃음인지 동경인지 모를 야릇한 웃음을 웃습니다.
전 그런건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가까이 수없이 많은 '이웃'들이 이 공기를 마시고 햇살에 취하여 함께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는 누구를 만나건 상관없이 먼저 나와는 '다름'을 먼저 찾으려고 합니다. '같음'이나 '이웃'이라는 말보다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전북 남원 운봉에서 반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참으로 고마운 인연들입니다. 얼마 전엔 김장을 했다고 김치를 한 통 가득히 전해주어 지리산 바람에 익은 김치를 지금도 맛보고 있고, 감자를 보내주어 지금도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습니다. 운봉에 사는 한 인연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또 다른 인연에게 들었습니다. 그 인연의 어머님은 자리보전하고 누우신 지 오래되었는데, 젊은 그 인연은 그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님의 병 수발을 도맡아 하고 공공근로와 농사 일등으로 조금의 돈을 마련하여 어머님 모시기에 정성을 다한 효녀입니다. 이 겨울비는 그 어머님 누우신 매요리 산자락 묏 등을 적시는 겨울비인가 봅니다.
큰 짐 벗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청년의 가슴엔 또 다른 슬픔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지 모를 일인데, '이웃'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창밖엔 겨울비 그치고 햇살 한 자락이 마당에 가득합니다. 저 마당 한켠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풀꽃들도 꽃잎을 모두 거두고 앙상한 줄기만 남긴 채 뿌리로 돌아가 오랜 쉼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난 '다름'보다는 '이웃'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다른 사람을 얘기할 때 흔히 '타인(他人)'이라고 합니다. 나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다름은 나를 뜻하는 '자(自)'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구분 지을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말할 때 '타종교(他宗敎)'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요즘엔 '타종교' 대신 '이웃종교'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이웃 나라'라고 표현하면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지지듯 이웃 종교라 하면 더불어 함께 이 세상을 맑히는 청량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를 얘기할 때도 우리 당과는 정강이나 정책이 다르더라도 동반자라는 파트너십을 갖는다면 '다른 정당'이 아닌 '이웃 정당'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세상은 '다름'만을 강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게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생김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특성'이라는 말로 생각하면 어쩔까 싶습니다. 자기가 특별히 이해하는 법, 오랫동안 견문에 익은 것, 혹은 자기의 의견으로 세워놓은 법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나, 혹은 각각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습성 등을 '특성'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람이 자기의 성질만 내세우고 저 사람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까운 사이도 멀어질 수 있으니,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사람마다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려는 너른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 모든 인류의 삶 속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는 말이 있지요. '개와 고양이', 혹은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뜻인데, 서로 좋지 못한 관계를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이 생겼나하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주고 받는 행동양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개는 '반갑다'는 표현이 꼬리를 흔드는 것인데, 고양이는 고리를 곳추 세우는 겁니다. 고양이는 꼬리를 흔드는 것을 '적대감'으로 받아들이고, 개는 고양이가 꼬리를 곳추 세우는 것을 '적대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을 먼저 이해하기 보다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중요합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튜닝을 해야 하는 겁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녀사이, 형제 사이, 이웃 사이로 한없이 넓혀 가며 주파수를 맞추다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남편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면 내가 먼저 튜닝을 하고 상대방의 행동을 헤아려봅시다. 아마도 아내의(남편의) 속내를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독심술(讀心術)이나 타심통(他心通)의 우선 전제는 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하고, 상대방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튜닝을 하여 상대방에게 주파수를 맞추면 내 마음이 요란하지도 어리석지도 그르지도 않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묘하게도 전파력이 아주 강합니다. 효과 만점이지요.
쌀쌀한 날씨지만 오후엔 햇살 청하며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할 예정입니다. 저와 함께 '이웃'으로 동행하지 않으실래요.
2001년 11월 29일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이른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립니다. 몇 잎 남지 않은 은행잎들은 마지막 춤을 추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듯 촉촉 젖고 있습니다. 백양사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노란빛에 취하여 그냥 저대로 바람에 흩날리게 내버려두기 아쉬워 고운 잎들을 모아 차안에 깔았습니다. 은행잎에선 알큼하고 아릿한 냄새가 납니다. 가을을 아쉬워하는 냄새 같기도 하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냄새 같기도 합니다. 차에 처음 탄 지인이 "너는 못말린다니까!!"라며 비웃음인지 동경인지 모를 야릇한 웃음을 웃습니다.
전 그런건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가까이 수없이 많은 '이웃'들이 이 공기를 마시고 햇살에 취하여 함께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는 누구를 만나건 상관없이 먼저 나와는 '다름'을 먼저 찾으려고 합니다. '같음'이나 '이웃'이라는 말보다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전북 남원 운봉에서 반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참으로 고마운 인연들입니다. 얼마 전엔 김장을 했다고 김치를 한 통 가득히 전해주어 지리산 바람에 익은 김치를 지금도 맛보고 있고, 감자를 보내주어 지금도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습니다. 운봉에 사는 한 인연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또 다른 인연에게 들었습니다. 그 인연의 어머님은 자리보전하고 누우신 지 오래되었는데, 젊은 그 인연은 그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님의 병 수발을 도맡아 하고 공공근로와 농사 일등으로 조금의 돈을 마련하여 어머님 모시기에 정성을 다한 효녀입니다. 이 겨울비는 그 어머님 누우신 매요리 산자락 묏 등을 적시는 겨울비인가 봅니다.
큰 짐 벗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청년의 가슴엔 또 다른 슬픔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지 모를 일인데, '이웃'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창밖엔 겨울비 그치고 햇살 한 자락이 마당에 가득합니다. 저 마당 한켠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풀꽃들도 꽃잎을 모두 거두고 앙상한 줄기만 남긴 채 뿌리로 돌아가 오랜 쉼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난 '다름'보다는 '이웃'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다른 사람을 얘기할 때 흔히 '타인(他人)'이라고 합니다. 나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다름은 나를 뜻하는 '자(自)'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구분 지을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말할 때 '타종교(他宗敎)'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요즘엔 '타종교' 대신 '이웃종교'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이웃 나라'라고 표현하면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지지듯 이웃 종교라 하면 더불어 함께 이 세상을 맑히는 청량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를 얘기할 때도 우리 당과는 정강이나 정책이 다르더라도 동반자라는 파트너십을 갖는다면 '다른 정당'이 아닌 '이웃 정당'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세상은 '다름'만을 강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게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생김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특성'이라는 말로 생각하면 어쩔까 싶습니다. 자기가 특별히 이해하는 법, 오랫동안 견문에 익은 것, 혹은 자기의 의견으로 세워놓은 법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나, 혹은 각각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습성 등을 '특성'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람이 자기의 성질만 내세우고 저 사람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까운 사이도 멀어질 수 있으니,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사람마다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려는 너른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 모든 인류의 삶 속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는 말이 있지요. '개와 고양이', 혹은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뜻인데, 서로 좋지 못한 관계를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이 생겼나하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주고 받는 행동양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개는 '반갑다'는 표현이 꼬리를 흔드는 것인데, 고양이는 고리를 곳추 세우는 겁니다. 고양이는 꼬리를 흔드는 것을 '적대감'으로 받아들이고, 개는 고양이가 꼬리를 곳추 세우는 것을 '적대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을 먼저 이해하기 보다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중요합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튜닝을 해야 하는 겁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녀사이, 형제 사이, 이웃 사이로 한없이 넓혀 가며 주파수를 맞추다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남편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면 내가 먼저 튜닝을 하고 상대방의 행동을 헤아려봅시다. 아마도 아내의(남편의) 속내를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독심술(讀心術)이나 타심통(他心通)의 우선 전제는 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하고, 상대방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튜닝을 하여 상대방에게 주파수를 맞추면 내 마음이 요란하지도 어리석지도 그르지도 않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묘하게도 전파력이 아주 강합니다. 효과 만점이지요.
쌀쌀한 날씨지만 오후엔 햇살 청하며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할 예정입니다. 저와 함께 '이웃'으로 동행하지 않으실래요.
2001년 11월 29일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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