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잘 배우고 잘 가르치는 일
요즘 신문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여러 조직과 조직, 단체와 단체간의 갈등과 반목이 그 도를 넘고 있는 것이다. 8.15 광복과 해방을 경축하기 위해 북한 각지에서 치뤄진 한민족간의 통일축전이 서로의 불신과 반목으로 갈등의 골만 깊게 하고 있다. 이른 바 돌출행동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남한 사회의 각 조직과 단체에서 리더들인데 그들의 행동 어디에서고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그 원인들을 여러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비판한 글들이 계속 실리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새벽 찬바람을 마셨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청량함에 온 몸이 깨어난다. 하루하루 이 변화의 흐름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참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오늘 하루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동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가늠하며 다짐하는 그런 순간이다. 이 순간은 어떤 종교의 의례처럼 거룩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며, 성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놓치면 하루의 의미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선생님"과 "스승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 살아왔다. 선생님과 스승님을 딱히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 차이를 어느 순간-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원 등-에 만나 헤어지면 그만인 관계와 지금껏 내 삶의 의지와 영혼을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얘기는 결국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배움"의 틀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배움의 시기와 자세 등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사실 이 배움은 인생의 어느 순간 순간의 합이 아니라 영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이 팔십이 되어서도 어린 손자에게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큰 사람이다. 옛말에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다. 묻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번 행사에서도 "잘 배우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려는 사람들의 돌출행동"이 가장 문제가 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 햇살이 뜨겁다. 오늘 그리는 이 풍경화가 새벽녘에 시작해서 정오를 지나고 있으니 새벽 찬바람부터 오후의 뜨묵한 햇살까지 온몸으로 안겨맞나 보다. "서릿한 자각"이 있었으면 "뜨거운 실천"의 길로 나가야 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 결단의 자각을 혼자만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이 한 세상 사는 동안의 직무유기일 뿐 아니라 책임회피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가르침"을 베풀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질서는 우리의 후세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가르쳐야 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지 않고 혼자만의 성을 만들고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내 얘기의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남 얘기에 귀 기울일줄 알아야 한다. 이 사회에 지금 목소리가 없는가. 넘쳐나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게 작금의 우리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재작년 5.18일을 앞두고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민주화 운동의 선봉을 자처했던 이른바 386세대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술자리를 벌린 일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화난 가장 큰 이유는 그들 가운데-다 잘난 사람들인데-그 어느 하나도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 이 사람들아! 지금이 어느땐가? 내가 서울 올라가서 한잔 살테니 좀 참자구."
물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시했다면 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술 마실 수 있다. 그건 자유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 술마심에 도가 있어야 하는게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주도가 없는 사람은 "애미, 애비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움"과 "가르침"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이 둘의 관계속에는 무엇보다도 "잘 배우려 하고, 잘 가르치려 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창조적인 긴장관계"가 있었야 한다. "창조적인 긴장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쌍방향의 관계이다. 소모적인 관계가 아니고 생산적인 관계이다. 퇴보하는 관계가 아니고 진보하는 관계이다.
아직 햇살이 뜨겁다. 이 뜨거움은 젊음이다. 잘 배우고 잘 가르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다. 바로 내 일.
자작나무숲.
요즘 신문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여러 조직과 조직, 단체와 단체간의 갈등과 반목이 그 도를 넘고 있는 것이다. 8.15 광복과 해방을 경축하기 위해 북한 각지에서 치뤄진 한민족간의 통일축전이 서로의 불신과 반목으로 갈등의 골만 깊게 하고 있다. 이른 바 돌출행동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남한 사회의 각 조직과 단체에서 리더들인데 그들의 행동 어디에서고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그 원인들을 여러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비판한 글들이 계속 실리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새벽 찬바람을 마셨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청량함에 온 몸이 깨어난다. 하루하루 이 변화의 흐름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참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오늘 하루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동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가늠하며 다짐하는 그런 순간이다. 이 순간은 어떤 종교의 의례처럼 거룩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며, 성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놓치면 하루의 의미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선생님"과 "스승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 살아왔다. 선생님과 스승님을 딱히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 차이를 어느 순간-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원 등-에 만나 헤어지면 그만인 관계와 지금껏 내 삶의 의지와 영혼을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얘기는 결국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배움"의 틀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배움의 시기와 자세 등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사실 이 배움은 인생의 어느 순간 순간의 합이 아니라 영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이 팔십이 되어서도 어린 손자에게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큰 사람이다. 옛말에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다. 묻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번 행사에서도 "잘 배우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려는 사람들의 돌출행동"이 가장 문제가 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 햇살이 뜨겁다. 오늘 그리는 이 풍경화가 새벽녘에 시작해서 정오를 지나고 있으니 새벽 찬바람부터 오후의 뜨묵한 햇살까지 온몸으로 안겨맞나 보다. "서릿한 자각"이 있었으면 "뜨거운 실천"의 길로 나가야 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 결단의 자각을 혼자만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이 한 세상 사는 동안의 직무유기일 뿐 아니라 책임회피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가르침"을 베풀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질서는 우리의 후세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가르쳐야 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지 않고 혼자만의 성을 만들고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내 얘기의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남 얘기에 귀 기울일줄 알아야 한다. 이 사회에 지금 목소리가 없는가. 넘쳐나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게 작금의 우리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재작년 5.18일을 앞두고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민주화 운동의 선봉을 자처했던 이른바 386세대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술자리를 벌린 일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화난 가장 큰 이유는 그들 가운데-다 잘난 사람들인데-그 어느 하나도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 이 사람들아! 지금이 어느땐가? 내가 서울 올라가서 한잔 살테니 좀 참자구."
물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시했다면 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술 마실 수 있다. 그건 자유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 술마심에 도가 있어야 하는게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주도가 없는 사람은 "애미, 애비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움"과 "가르침"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이 둘의 관계속에는 무엇보다도 "잘 배우려 하고, 잘 가르치려 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창조적인 긴장관계"가 있었야 한다. "창조적인 긴장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쌍방향의 관계이다. 소모적인 관계가 아니고 생산적인 관계이다. 퇴보하는 관계가 아니고 진보하는 관계이다.
아직 햇살이 뜨겁다. 이 뜨거움은 젊음이다. 잘 배우고 잘 가르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다. 바로 내 일.
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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