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120) - 행선(行禪)

자작나무숲이이원 2003. 11. 20. 00:12
행선(行禪)





가을볕이 식어지면 바람도 시리게 불어온다. 얼굴이 푸석거려 마른버짐이 피고 머리칼은 근질근질 비듬이 떨어진다. 걸어야겠다. 그리운 동지들과 함께 걷는 일심의 걸음걸음에 호수가 내게 오고 숲이 내게 오고 바람이 내게 온다.

윤슬로 흔들거리는 물결 위에 맑디맑은 아침 햇살을 얇게 한 겹 펴 바르고 그 위로 삽삽한 바람이 불면 몽글몽글 물안개가 핀다. 바쁜 나래 짓을 쉬고 있는 청둥오리 떼의 바쁜 갈퀴 짓이 눈에 보인다. 물수제비를 몇 번 떼며 또록 거리는 물 길 위에 기인 동심원이 이어 퍼진다.

산길에 접어들자 울울한 숲길에 길게 내리는 햇살 몇 줄기가 유난스레 밝다. 낙엽이 포근한지 철모르는 풀잎 몇 개 연록 빛으로 싹을 틔우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 눈이 올 텐데 아! 그 땐 어쩌지, 마음 잠깐 아리지만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갈색으로 길게 쌓인 낙엽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저 나무들처럼 철저한 인고의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본다. 한 해 한 해 속살을 찌우기도 하지만 저리 낱 없이 떨구고 제 밑을 살찌우는 그런 삶을 산 적이 있던가? 헐벗은 나목이라고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 느꼈던 그런 날들이 이젠 꿋꿋한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았다면 너무 앞선 생각일까. 나도 저 나무들처럼 떨구어 낼 때 제대로 떨구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조용히 내 삶의 모습을 반추하는 지혜가 걸음에 쌓인다.

다시 저수지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대신 물속 생명을 낚아 얼마나 많은 소주병에 억병으로 취했는지 널브러진 소주병이 산을 이루고 있다. 그 취한 뱃속으로 끌려들어갔을 붕어며 잉어들의 뭉게어 진 삶들이 아리다. 잠깐, 아니 찰나였을 게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떠난 생명들의 해탈을 축원했다. 그래서일까, 물속에서 붕어며 잉어들의 은비늘이 눈부시다.

이젠 대숲길이다. 기왓장을 대나무에 던져 딱-하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향엄지한 스님의 깨달음이 생각나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대나무 하나를 쳤더니 딱-하는 청아한 소리가 들린다. 깨달음이 아직 멀었는지 비록 깨달음은 없어도 느낌 하나는 참 맑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가을볕이 넘쳐서일까, 거웃 자란 나락들이 연둣빛으로 익고 있다. 고구마를 심었던 밭을 지나는데 아들 녀석 고추만한 고구마 하나 발에 채인다. 또랑물에 씻어 씹으며 아삭한 맛이 너무 좋다. 어느 문중의 제실을 지난다. 쇠락한 문중인지 기왓장에 쑥대가 높자라 있고 위패를 모셨을 사당 문 앞엔 플라스틱 모판만 가득하다. 주련에 쓰인 글들은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이 담겨있는 글이다. 한참을 서성이다 다시 걷는데, 느닷없는 비가 내린다.

함벽정 난간에 기대어 시조라도 한 수 읊었으면 그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포기해야겠다. 속이 젖지는 않는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걷다 뛰었더니 머리칼이 흠씬 젖고 가슴에선 땀이 난다. 아직 가야할 길,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발길에 어떤 깨침이 있었을까, 이젠 좀 쉬어야 할 시간이다.


* 행선은 걸으면서 하는 선의 방법으로 조용히 걸으며 내면을 바라보는 수련이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