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어느 무주택자의 봄

자작나무숲이이원 2003. 3. 2. 17:06
어느 무주택자의 봄





좁은 담 사이

외로 선 한 그루 동백나무

안으로 갈무리해둔 꽃망울 속 색을 보다

눈이 멀어

끈적끈적한 더듬이로 세상을 더듬다가

뒤돌아본 내 삶의 출발이 아득하고

허리춤에 달고 나온 겨울이 녹는다

이 무욕의 흐름이

팍팍한 대지에 물을 대는 것일진대

질척이는 땅으로 내리는 봄비를 맞다

파르르 떤 온 몸이 움츠러들어

바라볼 수 없는 봄은 봄이 아니라고

생각만 해도 온몸이 데워지는

이 기분 좋은 봄날 오후,

감당키 어려운 축복이 내게 오듯

집 떠난 달팽이 한 마리 등위에 봄 싣고

내게 오고 있다.



▣ 시작노트 ▣

창밖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다. 1미터 남짓하는 자그마한 나문데, 꽃망울이 어찌나 실하게 매달렸는지 모른다. 안방에서 함께 겨울을 보내던 화초들도 봄이어서인지 이파리들이 더 파릇하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집없는 달팽이 한 마리가 화분 옆을 기어간다. 굉장히 느린 것 같은데,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한뼘의 거리를 지치지 않고 달려간다(?). 기어가는 게 아니고 분명 달려간다. 그러고 보면 모든 말과 언어라고 하는 게 모두 제 본위로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되돌아봐진다.
달팽이는 그렇게 봄을 열고 오나보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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