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 - 봄맞이
마음 길을 후려치는 봄비가 내린다. 어쩌면 황량했을 법한 지난 겨울을 보내고 맞이한 봄인 까닭에 이 봄이 더욱 살갑고 정겹다. 지렁이 한 마리가 탱탱한 몸으로 외출하는가 보다. 아직은 쌀쌀해서 얼지 않을까 싶은데 힘차다. 저들 사는 세상보다 무서운 인간의 발자국을 피해 오래 오래 살았으면 싶은 마음에 나무 밑으로 옮겨 주었다. 주름을 폈다 오무렸다 하는 움직임이 힘차다.
도시의 욕망을 가슴에 담고 흐르는 강둑에 앉았다. 물이 흔들린다. 바람 때문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살 오른 붕어들이 튀기 때문이다. 별이 내린다. 별 속에 숨어있는 작은 그리움들을 헹궤내는지 강물도 반짝인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덧 어른이다. 좋고 싫음에 상관없이 어른이 되어있다. 그저 나이 듦의 어른이나 사고의 낡음 때문에 어른이 되어있는 건 아닌지 겨울을 털어 내는 내복을 벗는 것 보다 더 복잡한 삶의 방정식이다.
수없이 되새김질하는 어린 날에 대한 추억 때문에 혹시 난 지금 열 다섯이나 열 예닐곱쯤의 나이는 아닐지, 어쩌면 은하계의 한 별에서 지구에 온 우주인은 아닐까, 내 지구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건 어쩌면 내가 그 별에서 쫓겨난 왕이거나 왕자이진 않을까, 아마 이 봄이 완연해질 때쯤 내 살던 별에도 아름다운 평화가 숨쉬고 아름다운 벗들이 나를 찾아오리라는 생각, 유치한 생각일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유쾌한 봄이다.
지난 겨울이 그랬다. 다른 해 겨울과는 달리 심한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보냈지만 왠지 마음의 감기는 지독했다. 무언가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허망한 나이 듦과 낡음이 어디 있으랴.
할머님과 보낸 어린 시절의 겨울 아침은 허연 김이 오르는 세숫물을 떠놓고 아궁이 앞에서 손등을 불리는 일이다. 팅팅 불은 손등을 맨도롬한 돌멩이로 문질러 터지고 갈라진 손등의 묵은 때를 벗기는 일은 어린 날의 통과의례였다. 안티푸라민을 듬뿍 발라 저릿저릿한 쓰라림도 해진댁의 호통은 이겨내질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터지고 터지던 손등도 봄이 오는 기척이라는 있는 날부터 아물기 시작했다. 입춘을 맞아 입춘첩을 쓰고, 보리점을 치고 보릿국을 끓여먹으며 못다 한 겨울 놀이를 부지런히 하고 나면 얼음도 풀리고 응달의 눈도 다 녹는다. 억지로 눈썰매를 타려면 바지가 다 찢어져 혼줄 날 각오를 해야한다.
이 때부턴 새로운 먹거리가 생겨난다. 볕 잘 드는 산엔 춘란 꽃대궁이 살며시 삐죽 올라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부지, 환경파괴의 짓이었는데, "먹는개"라고 불렀던 그 꽃대궁은 알싸한 봄맛이었다. 그리 배부른 먹거리는 아니었지만, 조잘대던 아이들의 시끄러움은 잠재우기에 충분히 많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이들을 불러내는 데는 제격이었고, 맛도 있었다. 질세라 바로 뒤이어 참꽃이 핀다. 진달래꽃을 부르는 말이다. 하긴 고향에선 참꽃보다는 "창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때 집안에 들였던 고구마울을 헐어내고 나머지 고구마를 한꺼번에 쪄서 동네 아이들에게 주곤 했는데, 이 때의 고구마는 거의가 물고구마이다. 오래두면 밤고구마도 물고구마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질크덕한 단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이를 먹어 그 단맛의 고구마는 아직 먹어보지 못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유쾌한 일은 개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 그동안 다녔던 서당에서 요즘말로 종합시험을 본다. 대개는 책 한 권을 정해 함께 배우는데, 책거리를 하는 것이다. 겨울햇볕에 자란 시금치와 흙 속에 묻어둔 무를 채 썰고, 짚을 설렁 태워 얹은 시루에 콩나물을 길러 나물을 준비하고 팥 시루떡을 찐다. 요즘은 방앗간에 맡기면 만들어지지만 옛날엔 쌀가루와 팥고물을 켜켜이 안치고 밀가루를 개어 시루와 솥 사이를 막아 열심히 불을 때야 한다. 한 참을 쪄낸 후에 다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찍어봐야 아는 소나무 장작불에 제대로 훈김이 들어야 쪄지는 그런 구수한 맛의 떡이다. 다 쪄졌다고 해서 미리 맛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루 채 서당에 가지고 가니 떡 맛을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불 때는 일을 거들고 겨우 얻을 수 있는 게 시루와 솥에 개어 붙인 밀가루가 딱딱하게 굳어 떨어진 것인데, 그 맛은 요즘은 어떤 빵보다 맛있는 먹거리였다.
요즘은 사무실 창을 자주 연다. 바람은 온전히 감당하기엔 아직 찬 맛이 없지 않아 있지만 뒤 솔숲에서 풍겨오는 알쏘롬한 솔싹내가 몸 안의 피곤을 달래어 내보낸다. 어린이집 아이들의 노란 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이 맘때이다. 새 움 돋는 희망을 보듯 저 멀리서 한 아이가 온 세상이 제 세상인 듯 아장아장 뒤뚱뒤뚱 걸어온다. 마음에 점하나 찍은(點心) 뒤 느릿느릿 내게 오는 졸음과 나누는 대화도 재미있고, 양치를 하면서 느끼는 청량감은 머리를 말갛게 한다.
눈빛에 담고 마음에 채운 이른 새 봄빛 소식을 담아 소포로 준비한다. 찬란한 개화를 준비하는 꽃눈의 말간 빛, 나무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삽삽한 바람, 겨울 바람을 이기고 만들어낸 알쏘롬한 솔싹내, 봄 논에 파릇한 보리싹과 꽃피기를 준비하는 매화꽃망울, 낙엽속에서 봉긋 얼굴 내밀고 웃고 있는 춘란꽃대궁, 아장아장 잔디밭을 걸어가던 아이볼에 피는 웃음을 고마운 마음실로 엮어 보낸다.
봄은 추억 속에도 있지만, 지금 내 곁에서 담고 또 담아도 넘친다.
마음 길을 후려치는 봄비가 내린다. 어쩌면 황량했을 법한 지난 겨울을 보내고 맞이한 봄인 까닭에 이 봄이 더욱 살갑고 정겹다. 지렁이 한 마리가 탱탱한 몸으로 외출하는가 보다. 아직은 쌀쌀해서 얼지 않을까 싶은데 힘차다. 저들 사는 세상보다 무서운 인간의 발자국을 피해 오래 오래 살았으면 싶은 마음에 나무 밑으로 옮겨 주었다. 주름을 폈다 오무렸다 하는 움직임이 힘차다.
도시의 욕망을 가슴에 담고 흐르는 강둑에 앉았다. 물이 흔들린다. 바람 때문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살 오른 붕어들이 튀기 때문이다. 별이 내린다. 별 속에 숨어있는 작은 그리움들을 헹궤내는지 강물도 반짝인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덧 어른이다. 좋고 싫음에 상관없이 어른이 되어있다. 그저 나이 듦의 어른이나 사고의 낡음 때문에 어른이 되어있는 건 아닌지 겨울을 털어 내는 내복을 벗는 것 보다 더 복잡한 삶의 방정식이다.
수없이 되새김질하는 어린 날에 대한 추억 때문에 혹시 난 지금 열 다섯이나 열 예닐곱쯤의 나이는 아닐지, 어쩌면 은하계의 한 별에서 지구에 온 우주인은 아닐까, 내 지구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건 어쩌면 내가 그 별에서 쫓겨난 왕이거나 왕자이진 않을까, 아마 이 봄이 완연해질 때쯤 내 살던 별에도 아름다운 평화가 숨쉬고 아름다운 벗들이 나를 찾아오리라는 생각, 유치한 생각일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유쾌한 봄이다.
지난 겨울이 그랬다. 다른 해 겨울과는 달리 심한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보냈지만 왠지 마음의 감기는 지독했다. 무언가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허망한 나이 듦과 낡음이 어디 있으랴.
할머님과 보낸 어린 시절의 겨울 아침은 허연 김이 오르는 세숫물을 떠놓고 아궁이 앞에서 손등을 불리는 일이다. 팅팅 불은 손등을 맨도롬한 돌멩이로 문질러 터지고 갈라진 손등의 묵은 때를 벗기는 일은 어린 날의 통과의례였다. 안티푸라민을 듬뿍 발라 저릿저릿한 쓰라림도 해진댁의 호통은 이겨내질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터지고 터지던 손등도 봄이 오는 기척이라는 있는 날부터 아물기 시작했다. 입춘을 맞아 입춘첩을 쓰고, 보리점을 치고 보릿국을 끓여먹으며 못다 한 겨울 놀이를 부지런히 하고 나면 얼음도 풀리고 응달의 눈도 다 녹는다. 억지로 눈썰매를 타려면 바지가 다 찢어져 혼줄 날 각오를 해야한다.
이 때부턴 새로운 먹거리가 생겨난다. 볕 잘 드는 산엔 춘란 꽃대궁이 살며시 삐죽 올라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부지, 환경파괴의 짓이었는데, "먹는개"라고 불렀던 그 꽃대궁은 알싸한 봄맛이었다. 그리 배부른 먹거리는 아니었지만, 조잘대던 아이들의 시끄러움은 잠재우기에 충분히 많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이들을 불러내는 데는 제격이었고, 맛도 있었다. 질세라 바로 뒤이어 참꽃이 핀다. 진달래꽃을 부르는 말이다. 하긴 고향에선 참꽃보다는 "창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때 집안에 들였던 고구마울을 헐어내고 나머지 고구마를 한꺼번에 쪄서 동네 아이들에게 주곤 했는데, 이 때의 고구마는 거의가 물고구마이다. 오래두면 밤고구마도 물고구마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질크덕한 단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이를 먹어 그 단맛의 고구마는 아직 먹어보지 못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유쾌한 일은 개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 그동안 다녔던 서당에서 요즘말로 종합시험을 본다. 대개는 책 한 권을 정해 함께 배우는데, 책거리를 하는 것이다. 겨울햇볕에 자란 시금치와 흙 속에 묻어둔 무를 채 썰고, 짚을 설렁 태워 얹은 시루에 콩나물을 길러 나물을 준비하고 팥 시루떡을 찐다. 요즘은 방앗간에 맡기면 만들어지지만 옛날엔 쌀가루와 팥고물을 켜켜이 안치고 밀가루를 개어 시루와 솥 사이를 막아 열심히 불을 때야 한다. 한 참을 쪄낸 후에 다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찍어봐야 아는 소나무 장작불에 제대로 훈김이 들어야 쪄지는 그런 구수한 맛의 떡이다. 다 쪄졌다고 해서 미리 맛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루 채 서당에 가지고 가니 떡 맛을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불 때는 일을 거들고 겨우 얻을 수 있는 게 시루와 솥에 개어 붙인 밀가루가 딱딱하게 굳어 떨어진 것인데, 그 맛은 요즘은 어떤 빵보다 맛있는 먹거리였다.
요즘은 사무실 창을 자주 연다. 바람은 온전히 감당하기엔 아직 찬 맛이 없지 않아 있지만 뒤 솔숲에서 풍겨오는 알쏘롬한 솔싹내가 몸 안의 피곤을 달래어 내보낸다. 어린이집 아이들의 노란 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이 맘때이다. 새 움 돋는 희망을 보듯 저 멀리서 한 아이가 온 세상이 제 세상인 듯 아장아장 뒤뚱뒤뚱 걸어온다. 마음에 점하나 찍은(點心) 뒤 느릿느릿 내게 오는 졸음과 나누는 대화도 재미있고, 양치를 하면서 느끼는 청량감은 머리를 말갛게 한다.
눈빛에 담고 마음에 채운 이른 새 봄빛 소식을 담아 소포로 준비한다. 찬란한 개화를 준비하는 꽃눈의 말간 빛, 나무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삽삽한 바람, 겨울 바람을 이기고 만들어낸 알쏘롬한 솔싹내, 봄 논에 파릇한 보리싹과 꽃피기를 준비하는 매화꽃망울, 낙엽속에서 봉긋 얼굴 내밀고 웃고 있는 춘란꽃대궁, 아장아장 잔디밭을 걸어가던 아이볼에 피는 웃음을 고마운 마음실로 엮어 보낸다.
봄은 추억 속에도 있지만, 지금 내 곁에서 담고 또 담아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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