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708) - 모 심는 날 풍경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7. 10. 12:50
오늘 그린 풍경화 - 모 심는 날 풍경






도내기(고향 함평에 있는 조그마한 냇가의 이름) 옆 엿마지기 모내기를 준비하는 일은 모내기 훨씬 전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일이다. 할아버님은 재구아저씨에게 쟁기질을 하게 하고 몇 차례 써래질로 논바닥을 고르게 하셨다. 쟁기로 갈아엎은 땅은 풀풀 풀릴 정도로 써래질을 해야 한다. 쟁기질과 써래질을 하는 소를 보면, 콧바람을 연신 씩씩거리며 품어대는 소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내 묵혔던 논바닥은 여간 깡깡한 것이 아니다. 독새기며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핀 논바닥을 갈아엎는 일은 대단히 질서있는 일이다. 쟁기날을 따라 엎어지는 논흙이 아름답게 드러눕는다. 어쩌다 깊게 박힌 돌에 쟁기날이라도 부러지면 엿바꿔먹을 요량에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부러진 쟁기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 일보다는 구불한 논둑길을 바깥에서 삽으로 반듯하게 잘라낸 후 논안에서 발로 꾹꾹 다져밟은 뒤 손으로 맨도롬하게 논둑 모양을 새로 만드는 지리한 일이 기억에 선명하다. 어린 나는 주로 발로 밟은 논둑을 맨도롬하게 만드는 일을 하곤 했다. 구불한 논둘길을 한 바퀴 휘돌아오면 꾸득꾸득 말라가는 논둑의 찰흙빛이 미치도록 좋았다. 내 일을 마칠 때쯤, 할아버님은 한층 밑 논에 서서 기계충이 난 머리를 상고머리 깎듯 논둑에 난 풀들을 베었다.

모 심기 며칠전에 할머님은 장엘 다녀오신다. 품앗이로 일을 하기 때문에 모 심는 날은 품앗이 온 식구들 모두 밥을 먹기 때문에 여간 품이 드는 일이 아니다. 그날은 나산(전남 함평군 나산면) 사는 둘째 고모님이 집에 오셔서 손을 거드셨다.

모내는 일은 이른 새벽 손놀림이 빠릿한 어른들 모찌는 일부터 시작됐다. 지금이야 이앙기로 모를 심기 때문에 10센치 정도 자란 모를 심지만, 예전엔 진초록빛으로 30센치정도 거웃 자란듯한 모를 심었다. 엉덩이에 빨간 고무다라를 붙이고 앉아 모를 찐 뒤, 지게로 져 나르는 일은 대개 남자 일꾼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하였다.

짚으로 한단 한단 묶어진 모들(모춤이라 한다)은 논 군데군데 던져놓아야 한다. 이때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양철판이다. 양철판의 한쪽을 오그려서 끈으로 묶은 뒤 그 위에 모를 잔뜩 싣고 다니면서 중간 중간 모를 뿌려 두는 것이다. 그일은 거의 내몫이었다. 땅강아지를 쫓으며 느네(미꾸라지보다 조금 큰 물고기)를 따라 온 논바닥을 다니며 모를 던지는 일이다. 논둑길에서 풀쩍풀쩍 개구리가 논으로 달려든다. 포물선을 그리며 잘 던져야지 아니면 모춤이 풀어지기 십상이다. 모춤을 부리고 나면 날이 밝는다.

드디어 시작이다. 새벽 이슬을 털고 나와 시작된 일은 한나절이 훌쩍이기 때문이다. 못줄을 잡는 일은 어르신들 중 아직은 기력이 있는 노인분들이 맡았다. 단골로 그 일을 하던 분은 월남전 참전용사인 재룡이 아저씨가 맡았는데, 점심 나절까지가 못줄 잡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다. 점심시간이면 술에 곤죽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못줄을 잡기도 했는데, 여간 눈가늠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한 줄씩 떼는 게 아니고 두 줄씩 잡아서 떼는 일이라 조금만 가늠을 놓치면 심어진 모가 어느 한쪽으로 찌그러들기 때문이다.

이따금 집안 형수뻘 되는 나이 많은 한국떡(전라도에선 한국댁이라는 말을 ‘떡’으로 불렀다.)이 뽕짝이라도 한가락 뽑으면 일은 눈에 보이게 빨라졌다. 나는 적당히 모를 던져놓고 부지런히 집으로 들어간다. 새참을 가지고 나오는 일이 내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새참은 국수다. 국수를 삶고 애호박이며 계란을 풀어 국물을 만들고 김치를 잘게 썰어 넣고 말아서 먹는다. 이땐 시원한 샘물 한통과 설탕도 한 봉 들고 가는데, 뜨뜻미지근한 국물보다 시원한 설탕물에 후루룩 말아먹는 맛도 여간한 꿀맛이 아니다. 가끔도 설탕도 안달다며 사까리(사카린)를 녹여먹기도 했다. 막걸리도 필수다. 이장일 보는 상행이 형님집에서 말 통으로 한통 가져오면 거의 다 마셔제낀다.

못줄 잡은 재룡이 아저씨는 국수고 뭐고 없이 오직 김치를 씹으면서 연신 막걸리만 들이킨다. 좀 덜 취해 낮밥 먹을 때까지 못줄을 잡으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동네 사람들이 말리지만 한번 발동이 걸리면 쉴 줄을 모르니 그러다가 취하면 도내기 다리밑에서 늘어지게 잔다. 그러면 해질녘에 아주머니가 데리러 온다. 늘상 반복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해름 나절에 사립을 넘어오는 악닥구니를 듣는다. 하지만 재룡이 아저씨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잠을 '죽음'으로 자기 때문이다.

다행이 내가 기억하는 그날엔 그다지 술을 마시지 않아 오후까지 못줄을 잡을 수 있었다. 할아버님이 단도리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 중에서 할아버님은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까닭이다. 새참을 먹은 뒤엔 모심는 속도도 빨라진다. 난 또 다시 그릇을 챙겨 리어카에 싣고 와야 한다. 얼른 국수 그릇을 비운 한국떡이 도내기 개울물에 그릇을 씻어준다. 할머니와 나산 사는 고모가 와서 점심을 준비하지만 손이 모자라기는 매 한가지이다. 오죽 했으면 모내기철엔 부지깽이조차 덤벙댄다고 했을까.

온 동네가 모내기를 할 때의 메뉴는 대동소이했다. 주로 김치와 밥과 국인데, 김치는 새 봄에 심은 배추로 겉절이를 하고, 국은 닭 미역국을 끓였다. 이른 봄날 병아리를 사다 키운 닭들이 마치 맞게 살이 오르는 철이 모내기철이다. 할머님은 나를 보고 닭을 잡아오라고 하셨지만, 다른 일은 다해도 짐승을 잡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어 그 일은 고스란히 나산 고모의 몫이었다. 미역도 지금처럼 잘 풀어지는 미역이 아니라 몇 시간을 담궜다가 가마솥에 푹 삶아야 국맛이 나는 미역이다. 삶아진 닭은 일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끔 따로 건져 일일이 찢어놓는다. 참기름이 둥둥 뜬 미역국에 흰 닭살도 있고, 미역도 도톰하니 제법 씹을 맛이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얼굴에 흙탕물이 묻어있고, 거머리에게 뜯기는 줄도 모르고 피를 빨린 어른들은 짓궂게 뜯어낸 거머리를 뜨겁게 달궈진 돌멩이 위에 올려놓거나, 배를 뒤집어서 죽이기도 했다.

어른들, 내게는 형님뻘되는 어른들이 할아버님 모르게 막걸리 잔을 주기도 했다. 멋모르고 몇 잔 받아 먹은 날은 하늘이 노래지기도 한다. 오후 새참은 점심 남은 것에서 막걸리 한잔 씩 할 정도만 남기고 할머님과 고모님은 그릇을 챙기고 난 다시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들어온다. 얼른 다시 논으로 나가 잔심부름을 할라치면 저녁 해가 늬엿하다.

마당 한켠엔 모깃불 냉갈이 피어오르고 동네 샘터에서 대충 씻기를 마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날 저녁 식사는 낮에 일한 사람들만 모이는 게 아니다. 일 나온 집 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것이다. 마당엔 덕석(멍석)을 깔고 부엌에선 연신 음식을 나르기 바쁘다. 저녁 식사도 거개가 국만 바뀌고는 대부분 낮 반찬 그대로이다. 저녁 국은 돼지고기 고깃근이나 실하게 넣고 끓인 고깃국이다. 그 시절의 고깃국은 어찌 그리 비개가 많은지. 그래도 동네 개까지 냄새를 맡고 몰려들던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이렇게 모내는 날 하루가 진다. 그렇다고 해서 모내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한 이틀 지나서 비료도 뿌려줘야 하고 뜬 모 작업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할아버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이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가녘이나 물꼬는 애기 밥이라도 되는 법이다. 꼼꼼히 심어라.” 줄 맞춰 모를 심다보면 가장자리나 물꼬 주위는 아무래도 신경이 덜 쓰여 빠진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 부분만 제대로 심어도 아이들 밥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끝마무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모내기가 끝난 뒤 논둑엔 콩을 심으셨다. 콩은 "손 큰 여자 콩농사 짓듯”이란 말처럼 대충 듬성듬성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도내기 논은 물가에 있는 논이라 어지간한 가뭄에도 모내기를 할 수 있었지만, 함태골에 있는 천수답은 가뭄이 심하면 모내기를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모판에서 모를 키우지만 기다리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 때를 어떻게 맞추는지는 모르지만, 그 날을 알기 위해 쓴 방법은 덜 여문 밤송이를 따서 겨드랑이에 넣고 팔을 오므려 따갑지 않거나 단오날 대추를 시집보낸 뒤(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놓는 일) 열린 대추알을 따서 콧구멍에 넣어 들어갈 정도면 모내기를 했다. 만일 밤송이가 따끔하거나 대추알이 커서 콧구멍에 들어가지 않으면 대개는 메밀을 흩뿌리곤 했다. 그날은 대개가 하지를 지낸 10여일이 지난 정도였다.

올해 몇몇 지인들과 가까운 논으로 봉사를 나갔다. 뜬 모 작업이다. 이앙기로 심은 논이라 아직은 어린 연둣빛 모가 자라고 있지만 논 가장자리는 제대로 심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어릴 적 시골에서 모심는 날의 여러 풍경들을 얘기했는데, 모두들 굉장히 낯설어한다. 내가 그만큼 오래산걸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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