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304) - 노을속에 부친 편지

자작나무숲이이원 2001. 12. 3. 00:06
오늘 그린 풍경화 - 노을속에부친편지







언제나 바다는 내게 주는 영양입니다. 아아라이 부서지는 그 고운 빛살무늬에 혼곤히 취하다보면 삶속에서 건들대던 오만의 찌끼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묵직했던 머리도 가벼워지고, 빨갛게 충혈된 눈빛도 조금은 맑아집니다.


변산반도를 휘감고 도는 해변도로는 '해넘이'가 아주 장관입니다. 모처럼 바다를 보는 행복한 날인데, 밋밋한 바다를 보기보다는 한짬 쉬어가더라도 노을 빛으로 물드는 바닷가에서 줄지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내 맘속에 가득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때를 씻어내는 여유는 일부러라도 만들어 가져야 합니다.

모두 가슴 열고 만난 사람들입니다. 대섬(竹島)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모항(茅港) 근처에 관선헌(觀仙軒)이라는 찻집에서 후더분한 인상의 주인 아주머니에게 청하여 글 한쪽 남기고, 우전 다향에 흠씬 취하는 중입니다. 노곤한 몸안으로 아주 천천히 퍼지는 고 알싸름한 차 맛이 입안에 감겨 흐르는 동안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해가 바다 저 끝 수평선에 닿을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도 모자라 사진기를 들었습니다. 잘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셔터를 몇 번 눌렀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 차 한 잔 마신 후에 나오면 아마도 장관을 연출하고 있을 것 같은 흥분에 온 몸이 달아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함께 한 인연들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담(茶談)에 취해 있었습니다.

아! 어쩌지. 금새 회색빛 어둠이 온 산천을 감쌉니다. 정말이지 찰나로 생각될 그 짧은 시간에 해는 벌써 수평선 아래로 깊이 숨어버린 것입니다. 정말 멋진 해넘이를 보려했으면, 좀 쌀쌀한 날씨였지만 바깥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아끼지 말았어야 했는데, 게으른 마음 탓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음에' '좀 더 있다가'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다음에 좀 더 있다가, 마음이 더 뜨거워지기를 바라지만, 상대의 마음은 어쩌면 식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다음에 좀 더 있다가 망설이는 사이에 상대와 나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다리를 마주보면 건너고 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표현하는 일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눈빛만으로도 통한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피수단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마음과 눈빛만으로도 따스한 사랑이 흐르는 사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표현하고 싶을 때 표현합시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내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그 많은 감정들을 그리움으로 쌓아만 두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 되새겨보는 하루입니다.



2001년 3월 4일
자작나무 숲 마음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