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805) - 여름 한 낮 책 읽기

자작나무숲이이원 2001. 10. 30. 22:01
오늘 그린 풍경화 - 여름 한 낮 책 읽기





한없이 안으로만 침잠한 마음자락을 붙잡고 가만 가만 몸을 누인다. 지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어떤 향기를 맡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있고 있을 뿐이다. 먹는 일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늘어진 몸을 깨우는 시원한 물 한잔 마시는 것으로 포만감이 넘친다. 머릿골까지 시원해진다. 이쯤 되면 여름 더위라고 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 더우면 물 좀 뿌리면 완전한 자연의 모습에 합일을 하니 더우면 더운 대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탓에 햇살 뜨거우면 좀 낯을 찡그리고 열대야에 잠 못 드는 밤이 길더라도 오랫동안 별빛을 올려보는 즐거움이 늘었으니 충분히 견딜 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을라치면 읽고 있던 책을 펴든다. 이런 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벼운 책-사실 책에 가볍다는 말을 쓰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을 읽지만 이런 날일수록 난 옛 글을 읽는다. 그 중에서도 되도록 옛 종이의 눅진한 향이 나는 옛 글이 좋다. 짧은 글이나마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머리에 담아 조금씩 조금씩 되새김질 하다보면 수 백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시원함이 온 몸을 감싼다.
오늘은 《고문진보》를 읽었다. 정확하게 10년전 여름, 한 자 한 자 새기며 읽었던 책이다. 다시 꺼내어보니 책 사이사이에 고민하고 함께 했던 많은 생각의 꼭지들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 이런 여름에 음미해 볼만한 시 한편이 있다.

孟夏草木長(맹하초목장) 초여름에 초목이 자라고
繞屋樹扶疎(요옥수부소) 집 둘레의 나무들도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衆鳥欣有託(중조흔유탁) 뭇새들이 기댈 숲이 있음을 기뻐하고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 나도 또한 나의 초가를 사랑하네.
旣耕亦已種(기경역이종) 밭갈고 또한 씨 뿌렸으니
時還讀我書(시환독아서) 가끔씩 내 책을 읽는다.

도연명의 <讀山海經(독산행경)>이라는 시의 앞 구절이다. 계절이 흐르는 대로 해야할 일을 하면서 짬짬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 대한 행복감이다. 사실 난 대학에 다닐 때마다 방학이 되면 그 동안 읽지 못했던 책의 목록을 빼들고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수 십 권의 책을 꺼내들고 눈이 충혈 되도록 읽곤 했다. 아마도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어딘가 여행도 가고 밀쳐 두었던 일들도 마저 해 낼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난 요즘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살림이 여러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까닭이다. 주로 장성에 있지만 책은 익산에 거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20여권 가져다 놓고 읽고 있으니 넘치는 행복은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오후엔 비가 좀 흩뿌렸다. 소낙비이긴 했지만 달구어진 대지를 식히는데는 그만이었다. 늦은 시간에 광주에 있는 인연 한 명이 내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바람결에 몸이나 식히려고 들렸단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혼자 즐기는 오후에 벗이 찾아왔으니 그 즐거움이 얼마나 넘치겠는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차와 얘기를 나누었으니 그 행복이 어쩌겠는가.
사실 여름 보내는 방법은 시원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땀 속에서 느끼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느끼는 시원함도 있지 않는가. 아름다운 벗에게 저녁 산그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줌과 온 마음으로 담은 시원한 기도를 소포로 보내니 받아주길.


* 그동안 여러사정으로 많이 게을렀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빕니다. 더위에 모두 건강하시죠. 짧은 시간이나마 얼굴 가득 고운 웃음 함께 하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