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020) - 낮술

자작나무숲이이원 2001. 10. 30. 21:27
오늘 그린 풍경화 - 낮술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합니다. 하긴 요즘 마음은 왜 이리 요란한지 모를 정도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잠들지 못한 낮달이 식어갈 때 마음에 별빛 홀로 꿈 그리는 시간입니다. 낮술에 불콰해진 낯빛이 창백해지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건지 몰라 그냥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노을빛에 감추었습니다. 취기에 바로서지 못하는 약한 모습은 이미 죽음앞에 당당하기 보다 한없이 나약해지는 못남만 저녁구름처럼 검은 구름으로 변해가는가 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 밤은 왠지 시끄럽기 보다는 모든 소리의 근원을 헤집어 끝없는 적막으로 빠져드는게 아마도 낮술에 절은 내 마음이 약한 탓입니다. 약한 모습 보이긴 싫었는데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을 찾아 어둠의 정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찬란하게 빛나는 칠흑이 있습니다. 나나 너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 감사해야 할지, 차츰 잊혀지는 꿈길에서 깨어나야 하는건지 망설임만 가득한데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세상의 욕망이 혼자 꿈틀거리고 저 혼자 잘 났다고 해봐야 모두 부질없는 일이란걸 살아오면서 체험한, 온몸으로 받아드렸던 자존의 삶이 여지없이 으깨어지는 이 몰락의 현실이 너무도 감당키 어려운 탓입니다. 내 몸의 살틈에 가득 채웠던 사랑의 씨앗들이 촉촉젖은 땅을 찾고 있는데, 세상의 아름다운 소망들은 모두 검은 아스팔트 밑으로 숨어들어가고 어쩌다 싹틔운 욕망들은 뜨거운 햇살에 쓰러지는 이 처절한 나락앞에서 겸허를 배워야 할 때인가 봅니다.

아마 너무 많이 가졌나 봅니다. 그동안 난 비웠다는 겸손하다는 그 생각이 나의 오만임을 처연하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인연들 모두 다순 눈빛으로 그렁한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는데 모두 부질없는 아! 언젠가는 속 차릴런지. 언제나 내 본위로만 생각하는 어쩌지 못하는 속물근성의 소산인지 더욱 더 열심히 온전한 노력으로 더욱 더 초라해져야 가을 단풍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아낼것 같습니다. 내것 아닌걸 내것이라 욕심내고 본디 내것 아닌 그 모든 것 본래 주인 찾아주어야겠습니다. 이런 마음 끝에 해보는 자각 하나, 낮술은 위대합니다.

이제 조금 술이 깹니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리 많이 취한건 내 오만과 독선의 욕망에 절은 아직도 먼 내 공부길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한 번 취한 낮술에 쉽게 깨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이 가난한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선 이 밤을 온전히 깨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 마신 술 한잔에 의지해 세상 모든 외로움을 내것 삼아 그 틈새에서 참 쓸쓸한 기억은 내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끼악거려도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래도 정직하게는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그 마음이 철저하게 뭉개어졌을 때, 더 깊은 곳으로 빠져가야 하는 이 무기력, 내게 남은 힘은 하나 없습니다.

가야 할 때인가 봅니다. 포플러 빈 가지에 내려앉은 저 새 한 마리, 가을 하늘에 그릴 그림을 생각하고 바람이 전하는 무욕의 삶앞에서 당당해야지 그런 다짐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환희를 낱없이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도 가야할 때를 아는 듯 합니다. 씨를 맺으면서 햇살에 익어가며 그 꾸득거리는 얼굴에 감긴 그 오랜 미소를 내년 이맘때쯤, 오늘 내 보았던 그 웃음앞에 경건한 인사를 올리고 나면 내 할 일은 아마도 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술이 깰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밤은 깊을대로 깊고 더욱 더 또렷해지는 이 맑은 의식의 강은 지금 그대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창가에 스치는 저 오리온 별 자리는 내 눈빛을 맑히고, 그대 지금 이 순간 내가 기억하는 그 누구도 저 별을 바라보겠지 하는 생각에 얼굴에는 배시시한 웃음이 번집니다.

커피향이 상긋합니다. 이 흑갈색의 맛은 가을을 닮았는지 내 혀의 곳곳을 빠짐없이 순례하며 유혹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일부입니다."
아! 이 황홀의 끝을 보고 싶지 않아 더욱 더 내 혀끝에 의식을 집중하다보면 내 혀가 녹아납니다. 내 몸의 세포가 방울방울 흩어집니다. 이제부턴 나라고 해야 할 아무것도 내겐 없습니다. 이 존재의 희미함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온전한 나의 모습인가 봅니다. 이것도 욕심이고 욕망일까? 거짓만 아니면 싶은데, 이것도 안되는 일인가. 커피도 다 마셨습니다.

다시금 어둠에 쌓여 낮술에 부대낀 속내를 위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싶지만 아직 꿈길이 멉니다. 깨고 싶은데 좀 더 이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해야 하나봅니다. 술 한잔 더 마시기로 했습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보다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중에 가장 하고 싶은게 이건가 봅니다. 아니라 했는데 눈물이 흐르는게 아직은 사랑해야 할 아픔이 남아있는건지, 아니면 어둠앞에서 나약한 내 본래 마음이 되살아났는지는 정말이지 나도 모를 일입니다. 이 술은 취하지도 않습니다. 겨우 내 모세혈관을 따라 실핏줄을 더 굵게 하거나 조금 더 검붉게 할 뿐, 흐르지는 않습니다.

날이 새고 있습니다. 가끔씩 펴보는 허리에 감기는 감당못할 세월의 무게가 버겁다고 느꼈는데,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들의 정체를 미처 몰라 오랫동안 서글픈 이별만 생각했는데 모두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낮술에 취해 어둠으로 달리다가 다시 이 아침을 맞으면서 갖는 소회는 아직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수없이 비우고 또 버리면서 나를 찾아가는 지난(至難)한 삶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해장 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보다는 저 검은 바다를 순식간에 붉은 열망의 시로 바꾸는 찬란한 일출이라도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너무도 강하게 듭니다. 세수를 합니다. 얼음장을 띄운 것처럼 서늘한 물에 내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릿한 세수를 합니다. 아침입니다. 환희입니다. 가슴을 펴고 깊게 깊게 숨쉬어 봅니다.
아! 이 맑은 공기, 너무 큰 은혜입니다.


2001년 10월 20일
자작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