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도토리 키 재기

자작나무숲이이원 2003. 3. 31. 13:23
도토리 키 재기




천호산 자락에 잣나무 몇 주 심으려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주르륵 미끄러져 가는 길 끝에서 만나

발길에 톡 채인 도토리 한 알이

나와 키 재기하잔다 제 까짓게,

빈 삽질을 아무리 질러봐도

보이지 않는 심지(心地)하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오만의 꺼풀이 벗겨지려는 듯

나도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다며

싹눈 하나 틔우지 않고 오로지

땅으로 스며 두어 뼘 자란 긴 뿌리 하나 만들어

맵찬 겨울 칼바람을 이기고

뿌리 살이 토실 오른 이 해 봄에

삐죽 내민 그 작은 극미(極微)의 초록빛이

나를 미치게 한다




그 작은 몸 속에

이리도 긴 꿈의 뿌리를 갊아 두고

으랏찻차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나를 만나 놀라서일까, 잠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 자란 상수리나무

내 키를 넘어 자라 싱싱해지고 있다.


<시작노트>
지난 금요일에 계룡산 뒤편에 있는 한 산에 잣나무를 심으러 다녀왔습니다. 자갈이 많은 산이라 한참을 미끄러지다가 멈추어 선 곳에서 작은 도토리 하나가 발끝에 걸립니다. 그냥 산에 있는 도토리려니 했는데 움직이지 않아서 파봤더니 30여센치는 족히 자란 긴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무릎이 처지더군요. 대자연의 오묘함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외양만을 가꾸기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유심히 봤더니 정말 작은 싹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하고 있냐고 묻더군요. 대답하지 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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