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326) - 사는 일

자작나무숲이이원 2003. 3. 26. 03:03
오늘 그린 풍경화 - 사는 일





조용히 하루를 반추(反芻)해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히 의미 있는 삶의 영양이다. 그 하루가 은혜 가득한 세상이었다고 할지라도 돌아봄이 필요하고, 그 하루가 다시 생각하기 힘든 절망의 나락에 빠진 듯한 하루였다면 더더욱 필요하다. 하루가 엉망이 돼버린 느낌이 들 때가 왕왕이 있다. 그냥 그렇게 하루가 간 것 같은, 별 의미 없이 지난 듯한 느낌말이다.

봄볕에 적당히 그을린 낯이 좋긴 해도 꽃피는 걸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한바탕 휘젓는 날, 바람이 조금은 쌀쌀해도 오랜 시간 동안 밖에 서서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켜 놓고 눈만 껌벅이다보면 세상의 물상(物象)이란 것들이 조금씩 시들해 보일 때쯤 오롯한 쉼의 지경이 된다. 대단한 수행자는 못돼서 그 경지가 삼매(三昧)의 상태라거나 고요하고 두렷한 깨달음의 상태는 아니지만, 편안한 쉼을 얻었다는 자위는 얻을 수 있다.

무기력함을 느끼는 날은 몸과 마음의 균형추가 어느 한 쪽으로 쏠려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그 둘이 모두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무기력함의 원인을 정확히 안다면 그에 상응(相應)하는 대처기제를 찾아볼 수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그렇게 이유 없이 멍해진 생각의 공황상태가 되어버린 경우에는 막막하다는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익숙한 말로는 스트레스라고 한다. 이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경계를 지각하는 나의 심인적(心因的) 요인으로 인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똑같은 경계인데도 내 마음에 미리 경계에 대한 준비가 있다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준비는 평소에 내게 일어나는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른 상황들에 대해서 본래는 요람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들을 잘 달래고 가르쳐서 본래 없는 마음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잘 삐지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미리 조심하여 마음과 몸을 챙기면 창자라도 이어붙일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조심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 한다면 괜히 준 것 없이 밉고 싫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런 친구가 땅을 사면 간이 타들어간다고 했을까.

하지만 삶은 그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함이 아닌 굉장히 어려운 고차방정식(高次方程式)의 해법을 찾는 일이다. 부지런히 하고 또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단언컨대 없다. 삶 속에서 막연하게 어떤 상황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이 편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왜냐면 삶은 다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의 상태를 설명하기 보다는 그냥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다 담아내고 싶다. 어떤 이유를 대다보면 구차해질 수 있지만, 그냥, 딱히 이유를 물어도 말 할 수 없는 그냥이라는 말이 어쩌면 삶을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어느 옷의 광고처럼 10년을 입었어도 오늘 처음 입은 듯한, 처음 입는 옷인데도 10년을 입은 듯한 그런 새로움과 편안함이 주는 의미대로 그냥, 다른 이유가 필요치 않는 아름다운 사이를 만들어가는 좋은 사람인지를 반추해 본다.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러려고 노력할 뿐.

힘들 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내게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의 흐름 속에서도 그런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살아야 한다는 게 어쩌면 강박관념일지 모르지만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고 끊임없는 갈구(渴求)와 변함없는 정열(情熱)로 얻어지는 쟁투의 산물로 내가 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쟁투(爭鬪)의 끝으로 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자라는 풀을 돌로 눌러놓는 것[如石壓草]과 같을 뿐이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쟁투라면 온당한 방법으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것이 쟁투의 끝이다. 산다는 건 끊임없는 쟁투의 일이다. 자기와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봄 날, 꽃샘의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서 오들오들 떨면서 작아질 필요가 있다. 내게 갊아 있는 욕망의 찌끼들을 덜어내고 덜어내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져 민들레 홑씨가 될 때, 가볍게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올라 오대양 육대주를 흐르고 싶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낯선 섬에 내려 짭조름한 해조음을 들으며 달빛을 사모하는 노란 꽃을 피웠다가 지기를 한 1000년쯤 반복하면 아무 걸림도 막힘도 없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태산교악(泰山喬嶽)의 한 자락, 큰 바위에 새겨진 웃는 얼굴로 서서 비바람을 벗하며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 내 셈의 한계가 지나는 무량년(無量年)이 흐르면 젖은 땅으로 스며들어 몽글몽글 바스라 져 깊고 깊은 땅속 맨틀(mantle)까지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운 인연이 사는 집, 작은 텃밭에 융기(隆起)하여 좋아하는 꽃들을 계절 따라 피워내며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온힘으로 붙들고 있기를 다시 수 만년을 더하고, 그 흙마저도 자취 없이 꽃대를 따라 꽃잎에 스미어 햇살에 바래지면 내 욕심껏 이 세상을 살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다시 마음 챙기고 챙겨 마침내는 챙기지 않아도 챙겨지는 그 날, 거나하니 취해도 되지 않을까. 그게 사는 거고 사랑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