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120) - 다름의 아름다움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1. 20. 22:50
오늘 그린 풍경화 - 다름의 아름다움
대학시절 동기생들과 모꼬지를 가면, 나는 언제나 맡아 놓고 식사당번을 했다. 워낙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맛있게 먹어주는 동기들이 고마워서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끼니마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였다. 국거리는 없고 된장만 있으면, 새벽 찬바람을 맞고 한 소쿠리 쑥을 뜯어서 쑥국을 끓이기도 하고, 김치만 있으면 대여섯 가지 반찬은 금방 만들곤 하였다.
언젠가는 계란 한판을 앞에 두고 먹고 싶은 대로 해 주겠다 했더니 주문이 많다. 생계란, 반숙, 완숙, 찜, 계란말이, 수란, 찐 계란도 반숙, 완숙 등 많은 주문에 해주다 보니, 한 쪽에서는 과연 주문한 대로 요리가 나올까 궁금해 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뭘 그리 까탈스럽냐?’며 여러 가지를 주문한 동기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불이 두개라 한쪽에서는 찐 계란을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후라이부터 해서 계란말이까지 차례로 다해 주었다.
계란 요리를 먹는데 어떤 요리를 먹는 것이 옳은 걸까, 시비를 말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흔히 그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려 한다. 식당에 가서도 주인의 편의를 위해서 너도 나도 같은 음식을 시키는 것 보다는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 입장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양보할 줄도 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을 재는 시비의 저울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이해의 저울이다. 경북 상주의 한 어린이집에서 두어달 지낸 적이 있다. 그때 가훈 전시회를 개최하여 많은 집의 가훈을 새로 정하여 써 주었다. 참 좋은 말 가운데 가려 뽑은 가훈을 많이 적어주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하나는 “손해보고 살자”는 가훈이다. 그 가훈을 정한 내용을 적어오게 했더니, 이익보고 살려고 하면 누군가가 손해를 봐야 하는데 그렇게 살면 세상이 참 삭막할 것 같고, 우선 손해보고 살자고 하면 마음의 편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가훈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그름’과 ‘나쁨’이라는 잣대로 보려는 못된 습관이 있다. 지연, 학연, 혈연, 종교, 정치 성향 등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야말로 이유 없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해 왔는가. 하지만 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고향이 전남 함평이지만 강원도와 부산에서 살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학교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즐겁고 유쾌하게 만나 아름다운 사이를 가꾸어왔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성은 자기가 특별히 이해하는 법이나 오랫동안 보고 들은 것, 자기가 의견으로 세워 놓은 법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나,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습성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러한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부딪치기 쉽다.
내가 아는 것을 저 사람이 모르거나, 혹 지방의 풍속이 다르거나, 노소의 생각이 다르거나,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다르면, 내가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심지어는 미워하기도 하는데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기가 흐르게 된다. 한 번 더 곰곰 생각해 보면 ‘다름’은 기쁨이고 유익이고 보람이다. 요즘 들어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특성화 교육’이다. 대안학교라는 게 있다. 흔히 알고 있기는 제도권 교육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권 교육의 대안(代案)이라는 의미에서 대안학교(물론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은 아니지만 우선 쓰기로 한다)라고 한다. 나는 상당한 기간동안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나 함께 얘기하고 고민하였다. 처음에는 선입견도 없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선입견은 깨져갔다. ‘일탈한 학생’이라기보다는 무언가가 다른 학생들이었다. 요리하고 춤 추는 걸 무지 좋아하거나, 목공예나 도자기 만들기를 무척 좋아하거나 아니면 농사짓고 닭 기르는 걸 아주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학교의 기대, 부모의 기대가 있는데 그 기대가 다르고 그 기대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 다름, 즉 특성이 있음을 이해해 주고 수용해 주는 분위기에서 모든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였다. 대학진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새롭게 공부에 흥미를 갖고 정진한 아이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걸 보았다. 물론 일찍 직업을 갖는 경우도 매우 보람있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다름을 아름답게 보려면 ‘이해’라는 아주 멋진 친구도 사귀어두어야 한다.
다름은 아름다움이다.
대학시절 동기생들과 모꼬지를 가면, 나는 언제나 맡아 놓고 식사당번을 했다. 워낙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맛있게 먹어주는 동기들이 고마워서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끼니마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였다. 국거리는 없고 된장만 있으면, 새벽 찬바람을 맞고 한 소쿠리 쑥을 뜯어서 쑥국을 끓이기도 하고, 김치만 있으면 대여섯 가지 반찬은 금방 만들곤 하였다.
언젠가는 계란 한판을 앞에 두고 먹고 싶은 대로 해 주겠다 했더니 주문이 많다. 생계란, 반숙, 완숙, 찜, 계란말이, 수란, 찐 계란도 반숙, 완숙 등 많은 주문에 해주다 보니, 한 쪽에서는 과연 주문한 대로 요리가 나올까 궁금해 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뭘 그리 까탈스럽냐?’며 여러 가지를 주문한 동기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불이 두개라 한쪽에서는 찐 계란을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후라이부터 해서 계란말이까지 차례로 다해 주었다.
계란 요리를 먹는데 어떤 요리를 먹는 것이 옳은 걸까, 시비를 말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흔히 그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려 한다. 식당에 가서도 주인의 편의를 위해서 너도 나도 같은 음식을 시키는 것 보다는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 입장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양보할 줄도 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을 재는 시비의 저울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이해의 저울이다. 경북 상주의 한 어린이집에서 두어달 지낸 적이 있다. 그때 가훈 전시회를 개최하여 많은 집의 가훈을 새로 정하여 써 주었다. 참 좋은 말 가운데 가려 뽑은 가훈을 많이 적어주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하나는 “손해보고 살자”는 가훈이다. 그 가훈을 정한 내용을 적어오게 했더니, 이익보고 살려고 하면 누군가가 손해를 봐야 하는데 그렇게 살면 세상이 참 삭막할 것 같고, 우선 손해보고 살자고 하면 마음의 편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가훈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그름’과 ‘나쁨’이라는 잣대로 보려는 못된 습관이 있다. 지연, 학연, 혈연, 종교, 정치 성향 등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야말로 이유 없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해 왔는가. 하지만 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고향이 전남 함평이지만 강원도와 부산에서 살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학교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즐겁고 유쾌하게 만나 아름다운 사이를 가꾸어왔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성은 자기가 특별히 이해하는 법이나 오랫동안 보고 들은 것, 자기가 의견으로 세워 놓은 법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나,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습성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러한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부딪치기 쉽다.
내가 아는 것을 저 사람이 모르거나, 혹 지방의 풍속이 다르거나, 노소의 생각이 다르거나,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다르면, 내가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심지어는 미워하기도 하는데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기가 흐르게 된다. 한 번 더 곰곰 생각해 보면 ‘다름’은 기쁨이고 유익이고 보람이다. 요즘 들어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특성화 교육’이다. 대안학교라는 게 있다. 흔히 알고 있기는 제도권 교육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권 교육의 대안(代案)이라는 의미에서 대안학교(물론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은 아니지만 우선 쓰기로 한다)라고 한다. 나는 상당한 기간동안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나 함께 얘기하고 고민하였다. 처음에는 선입견도 없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선입견은 깨져갔다. ‘일탈한 학생’이라기보다는 무언가가 다른 학생들이었다. 요리하고 춤 추는 걸 무지 좋아하거나, 목공예나 도자기 만들기를 무척 좋아하거나 아니면 농사짓고 닭 기르는 걸 아주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학교의 기대, 부모의 기대가 있는데 그 기대가 다르고 그 기대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 다름, 즉 특성이 있음을 이해해 주고 수용해 주는 분위기에서 모든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였다. 대학진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새롭게 공부에 흥미를 갖고 정진한 아이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걸 보았다. 물론 일찍 직업을 갖는 경우도 매우 보람있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다름을 아름답게 보려면 ‘이해’라는 아주 멋진 친구도 사귀어두어야 한다.
다름은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