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가을 햇살에 마르는 것들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1. 2. 00:03
가을 햇살에 마르는 것들





하얀 기저귀 햇살 불러 고실고실 마른다

가을빛 닮은 아이가 하얗게 웃고

하늘빛 닮은 엄마가 노랗게 웃는다

아스팔트 위엔 나락이 마른다

마치 맞게 부는 바람결이 살가운지

당그래 미는 농부의 희망이 웃는다

간밤 머리 아프다며 뒤척이던 인연

우두커니 햇살에 앉아 눈을 지긋 감더니

온 몸으로 차 오르는 환희, 방긋 웃는다

우울을 불러 꾸득 꾸득 말려담았다

슬픔의 가슴살 사이가 이어 붙고

외로움의 마음밭에 희망이 자라고

잠자던 세포들이 깨어나 엔돌핀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나, 가을 햇살에 마르고 있다




★시작노트★

가을이다. 완연하다는 말처럼, 가을이 농익었다. 잘 여문 석류, 가슴 빠개지듯이.

가족과 경주에 다녀왔다. 불국사, 석굴암, 박물관, 분황사, 안압지...등등 명승 고적들을 찾아다녔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천년고도를 살피기엔 '주마간산'이 아닌 '눈 깜짝할 새'보다 더 빨리 "찍고" 다녔다.

바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 가을 햇살을 온전하게 보았다. 야트막한 들녘 놀긋 익은 벼들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정갈한 모습을 보았다. 천년을 잠들어 있는 능위에 앉아 수학여행온 풋풋한 아이들 웃음같은 모습을 보았다. 이 세상 나 혼자라면 훌러덩 옷을 벗고 너울너울 춤을 추고 싶었다. 그렇게 햇살이 좋았다.

기막히게 좋았다. 그것을 온전하게 옮기지 못하는 내 모국어가 부끄럽다.


- 글 :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