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026) - 무설전(無說殿) 앞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0. 27. 22:40
오늘 그린 풍경화 - 무설전(無說殿) 앞






가을 산사를 찾아 붉게 물든 산자락의 가을빛에 취하다가, 시끌사끌한 절 안으로 들어섰다. 절집의 맛은 누가 뭐라 해도 적묵(寂黙)의 순간일텐데, 너무너무 소리가 넘친다. 바람소리면 족하고 풍경소리만으로도 넘칠텐데, 팔도의 말로도 모자라 이방인의 말까지 넘친다.

신라 천년의 꿈이 녹아든 가을햇살이 온몸에 퍼진다. 몽글몽글 엔돌핀이 솟고, 내 몸도 광합성 작용을 쉬지 않는다.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우뚝하다. 연신 쏟아지는 감탄의 소리가 신라 문화 예술인들의 혼이 정미(精美)하게 갊아 있고 1000년의 소리가 가득하다.

회랑길을 돌아 무설전 전각에 다다라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울퉁한 마루에 앉아 깊은 선(禪)의 세계에 들었던 몇 해전, 나를 혼곤히 취하게 하던 그런 맛은 없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무설(無說), ‘말 없음’이라는 말은 여전히 가슴 가득 울린다.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말없음이 내게 말하는 유설의 가르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데도 난 문자에 얽매이고 소리에 얽매여 참 마음의 소리를 놓치고 있는건 아닌지, 귀를 닫았다. 소리가 끊긴다. 그런데 이 무슨 미묘함이란 말인가,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생각하나 떠오른다.

향엄지한(香嚴智閑) 스님에게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게 했던 위산(潙山)선사의 불설(不說), 즉 말하지 아니함의 은혜, 위산 스님이 지한 스님에게 묻는다.

“부모님께 몸 받아 태어나기 전”과 “동과 서가 나뉘기 전”을 일러보라 하자, 지한 스님은 어리둥절해 한다. 이 말 저 말을 많이 사뢰지만, 위산 스님은 인가하지 않는다. 지한 스님은 애가 탄다. 그 말의 뜻을 스승님께서 알려주시면 좋으련만, 잔잔한 미소만 머금으신 채 말씀이 없으시다.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위산 스님이 입을 뗀다.

“내가 나의 소견으로 말하더라도 너의 안목에는 별 이익이 없을 것이다.”

말해줘도 모를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스승님을 원망해 본들 무엇 하겠는가. 달빛을 청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지만, 찾을 수가 없다. 열심히 공부한 그동안의 시절이 허망하게 여겨져 책을 모두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는 스승의 문하를 떠나 멀고 먼 유력(遊歷)의 길을 떠난다.

어느 날 남양혜충(南陽慧忠)의 유적을 돌아보던 어느 날, 풀을 베다가 풀섶에 있는 기왓장을 들어 뒤로 던지자 ‘딱’하는 청아한 소리가 들린다. 대나무에 부딪친 소리이다. 그 소리에 깨달았다. 그걸로 끝이다. 가르쳐주지 않으신[不說] 스승님의 너른 사랑에 스승님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말 없음이 묘미이다. 정말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 모두 깨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간절함’ 즉 정성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고 골똘했을까를 말이다.

무설전 앞에 서자 왜 이 이야기가 생각난걸까. 잠깐 멍해지며 그동안 내가 뱉은 말들의 바다가 눈에 보인다. 고운 향내보다는 향기롭지 못한 내음이 넘실거린다. 무심코 뱉은 말 한 마디가 다른 사람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하며, 따뜻한 위로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난 과연 어느 길에 서 있을까.

추리고 추린 정갈한 말의 씨앗들을 모아 절망과 좌절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의 씨를 뿌리리라. 그러기 위해 아직은 내 안에 내 안에 갈무리해 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