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돌의 약속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0. 7. 14:10
돌의 약속





겨울 바다에 홀로 서서

가슴 푸른 당당함을 묻고는

슬피 우는 눈물을 뿌려

진실이라는 돌 하나 주워들고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는 대신,

가슴 바다 한 가운데 던져 넣어

부서지는 부서지는

하얀 울음으로 부서지는

이별이 얼어가고 있다.



격포(格浦)에 다녀와서

까만 돌 하나에 하얀 사랑을 새겨

나붓 건네는 아릿한 눈가에

밤별이 잠들고

부서지다 부서지다

끝내 일어서는 오랜 세월 하나가

이제 돌아가려는데

난 여태 사랑을 모르고 있으니.


손끝, 아주 예민한 촉각을 세워

돌에 새겨진 천년의 약속을 읽으면

바다 속으로 흐르는 천년의 사랑이

밤새워 울부짖는데

가슴 저려 잠못들고

내 가슴에 한 땀 한 땀 옮겨 새기는

천년의 약속이여.

천년의 사랑이여.


★시작노트★

바다가 주는 매력은 뭐니해도 탁 트임이다. 세상살이라는게 무수히 많은 벽과 부딪치게 되는데 일단 바다에 서면 그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채 내가 가장 우뚝 당당하게 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만함으로 설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은 아니다. 가장 겸허한 자세로 섰을 때 그 시원함을 온전하게 전해 주는 것이다. 가을 바다나 겨울 바다처럼 폐부를 오비어파는 청량함은 '겸허한 당당함'이 아니고는 맞을 수가 없다.

또래들과 함께 "언덕위에 하얀 집(정신병원)"으로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한달에 두차례씩 훈련(엠티)을 났었다. 그 훈련 때 격포(변산반도에 있는 바닷가, 채석강이 유명함)에 갔는데 한 친구가 돌멩이 하나를 주어주었다.

그 바닷가에 거친 돌뿐인데 참 곱게 갈려진 돌이었다. 그 돌을 받아들고 주머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가지고 놀다가 그 돌에 새겨진 아주 오랜 사랑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선뜻 내게 건넨 돌멩이 하나에서 그 오랜 세월을 읽는다니, 나도 참 별나다 싶지만 지금도 내겐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가 예사롭지 않다. 모두가 다 역사이다. 하찮은게 하나도 없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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