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기억하는 이름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9. 25. 00:58
기억하는 이름





머리 속이 흔들리면

모든 운명 앞에 순종해야지

괜히 감당 못할 운명 앞에

흔들리는 머리로 대들면

내 두 개골이 빠개져

저 강물로 흐르는

골빈 사내의 혀영심을 보게 되리라.


내 머릿속 어느 부분,

아마도 전두엽과 후두엽 사이

뇌간 바로 밑을 지나는

내 운명의 프로그램이 일으키는 에러,


BAD COMMAND OR FILE NAME.


도저히 불러 올 수 없는

기억 못하는 이름들이

자음과 모음으로 흩어져 쌓여있는

후두엽 옆에 마련된 분쇄된 기억창고에서

내 모든 신경을 차단하고

아주 어린 날 동화 속의

기억으로만 살아가라는

순수의 명령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살아온 지난 날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이젠 가야지.

머릿속이 흔들리더라도

내 운명의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저 이름을 위해

또다른 내 운명을 걸어야지.


[시작노트]
이 시를 보면 내가 386세대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컴퓨터의 운영체제인 도스의 명령어의 하나를 시어를 썼기 때문이다. 명령을 잘 못내리거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을 때 뜨곤 하는 'BAD COMMAND OR FILE NAME'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게 막히기때문이다.

그걸 경험하면서 사람사이의 일도 그렇게 막히면 어떻게 할까. 생각이 들었다. 답은 없다. 사람은 컴퓨터보다 더 오묘한 생각이라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는 정직하다. 내가 잘만 저장해두면 아주 오랫동안 명령만 내리면 고스란히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사람의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섬찟해짐을 느낀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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