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917) - 창의성이라는 말의 의미, 하나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9. 18. 00:01
오늘 그린 풍경화 - 창의성이라는 말의 의미, 하나
▣창의성이 뭐길래???
요즘 교육을 말하면서 ‘창의성’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듯 하다. 내가 자랄 때는 이 창의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 ‘창의’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뜻한다. 그러니 창의성은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낼 수 있는 바탕’인 것이다.
아이들의 연령별 발달 단계에서 ‘새로움’은 늘상 새로운 것이다. 즉 창의성의 판단 기준은 아이들의 발달 영역에서 오감을 통하여 직접 접하는 새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바로 창의성인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의 오감에 새롭지 않은 것은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몰아붙이기 일쑤다. 아이에겐 모든 새로운 것이 창의성의 대상이고 영역인 것을 모르고 말이다. 아이들은 쉽게 싫증을 내지 않는다. 싫증은 어른들 얘기지, 아이들의 언어나 행동은 아닌 것이다.
‘치료 레크리에이션(TR)’이라는 정신과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스텝 중 하나가 있는데, 여기에서 아이들의 정서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가장 쉽게 이용하는 것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체질화 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일상적인 생활 영위’를 위한 수준까지 오르면 그 치료효과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판단한다. 창의성은 그만큼 아이들의 발달 영역에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창의성 만능 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는 저녁 늦게까지 그 날 배운 것을 외우고 아침 일찍 서당(전남 함평에 있던 樂山書齋)에 가서 훈장님께 문안 인사 여쭙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운 뒤 다시 그 날 배울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작정 암기한다는 것의 부담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 한 30년 가까이 지나서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자양분으로 작용했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스펀지가 되고 물이 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마치 콩나물 시루처럼 말이다.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을 때 밑에 큰 함지박을 놓고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태운 짚을 깔고 그 위로 물을 부으면 거의 대부분이 밑으로 다 빠지는 것 같은데, 콩나물은 자란다는 것이다. 정말 물이 다 빠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필요한 만큼만 빨아들인 것이다. 인삼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삼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조량의 조절이다. 검은 비닐 천으로 가리는 것은 일조량이 많은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창의성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경의 ‘인위적’이지만 절대적인 조성을 어버이들이, 이 땅의 어른들이 맡아야 한다. 즉, 콩나물이 자라도록 물을 주는 일과 햇볕을 다 쬐지 못하도록 차양막을 설치하는 일 등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절로 자라게 될 것이다.
▣믿을 놈 하나 없네?
연전에 (2000년 3월 20일) 신문에서 안타까운 기사를 읽었다. 여중생 살해 사건의 범인이 열 다섯 살 먹은 중학생이었다는 것이다. 범행 동기도 간단했다. 술을 먹고 들어와서 엄마와 누나에게 욕을 하는 아빠를 말렸지만, 학교 성적을 들먹이며 나무라기에 홧김에 칼을 들고 와서 낯 모르는 여중생을 만나 그냥 찔렀다는 것이다. 학교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생활이나 교우관계는 원만한 모범생이었다는 선생님의 말도 함께 실려 있었다. 부모의 행동이 자녀의 인격 형성이나 가치 판단에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그렇다면 내 아이는 어떠한가? 요즘은 어떤 일방적(一方的)이고 일회적(一回的)이며 단선적(單線的)인 기준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다방적(多方的)이고 다회적(多回的)이며 복합적(複合的)인 기준이 통용되는 시대이다. ‘착하다’는 개념은 상식적으로는 좋은 개념인데, ‘착하기만 해 가지고는…’이라고 말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책을 잘 읽는다’는 것도 좋은 의미중의 하나인데, ‘책벌레’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언어에 있어서도 다의적이고 이중적인 가치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은 쉽게 통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창의적인 ‘multi'개념이 통용되고 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형의 사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팔방미인은 어떤 기술이나 테크닉의 영역에서 다종 다양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극대화 표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팔방’이다. 즉, 관계의 유연성, 사고의 탄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술고래인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술에 대한 인식을 갖고 비교해 보면, 똑 같이 술고래이거나 아니면 술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갖는 것은 지난 세기의 관점이라면, 술을 드시는 아버지를 위해 다양한 방법의 음주 양태나, 음주와 단주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21세기형 유연성이다.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여러 방법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답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답이 나올 수 있는 개연성(蓋然性)이 통하는 시대이다.
믿을 놈 하나 없다 하고 내 자식도 믿을 수 없는 안타까운 세상이 되버린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만 사람이 희망이라는 진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창의성과 책 읽기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하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 새로운 경험을 접하게 하는 가상 현실로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책 읽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얻음’을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창의성’향상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어떤 얻음을 생각하는 것이 어버이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책 읽기를 통해서 당장 눈 앞에 가시적인 효과를 생각한다면 그 책 읽기는 당장 그만 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극단적인 것 같아 그만 두기로 하자.
책 읽기는 어쩌면 콩나물을 키우는 물과 같은 존재이다. 콩나물을 키우는데 물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대부분이 밑으로 빠져버린다고 콩나물을 키우는 실제 양만을 주면 과연 콩나물을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콩나물을 먹을 수 없을 지 모른다. 다 빠져간다고 해서 다 빠져나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책 읽기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접근’이라기 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어른들의 책 읽기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목적들이 있지만, 아이들의 책읽기는 또래 아이들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의 모방과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속에서 성장하는 아주 다양한 놀이중의 하나이다. 즉 책은 중요한 놀잇감의 하나이며, 책 읽기는 다양한 놀이방법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부모들의 욕심을 벗어난다면 아이들의 책읽기는 훨씬 즐거운 일이 될테고, ‘창의성’도 저절로 자라게 될 것이다.
부모들이 창의성과 관련하여 가장 쉽게 범하는 우(愚)가 창의성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그 시작과 끝을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작과 끝을 알면 그것은 이미 창의성이 아니다.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창의성은 제한적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의 세계는 무궁하다는 것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
* 이어집니다...
▣창의성이 뭐길래???
요즘 교육을 말하면서 ‘창의성’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듯 하다. 내가 자랄 때는 이 창의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 ‘창의’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뜻한다. 그러니 창의성은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낼 수 있는 바탕’인 것이다.
아이들의 연령별 발달 단계에서 ‘새로움’은 늘상 새로운 것이다. 즉 창의성의 판단 기준은 아이들의 발달 영역에서 오감을 통하여 직접 접하는 새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바로 창의성인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의 오감에 새롭지 않은 것은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몰아붙이기 일쑤다. 아이에겐 모든 새로운 것이 창의성의 대상이고 영역인 것을 모르고 말이다. 아이들은 쉽게 싫증을 내지 않는다. 싫증은 어른들 얘기지, 아이들의 언어나 행동은 아닌 것이다.
‘치료 레크리에이션(TR)’이라는 정신과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스텝 중 하나가 있는데, 여기에서 아이들의 정서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가장 쉽게 이용하는 것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체질화 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일상적인 생활 영위’를 위한 수준까지 오르면 그 치료효과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판단한다. 창의성은 그만큼 아이들의 발달 영역에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창의성 만능 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는 저녁 늦게까지 그 날 배운 것을 외우고 아침 일찍 서당(전남 함평에 있던 樂山書齋)에 가서 훈장님께 문안 인사 여쭙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운 뒤 다시 그 날 배울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작정 암기한다는 것의 부담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 한 30년 가까이 지나서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자양분으로 작용했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스펀지가 되고 물이 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마치 콩나물 시루처럼 말이다.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을 때 밑에 큰 함지박을 놓고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태운 짚을 깔고 그 위로 물을 부으면 거의 대부분이 밑으로 다 빠지는 것 같은데, 콩나물은 자란다는 것이다. 정말 물이 다 빠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필요한 만큼만 빨아들인 것이다. 인삼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삼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조량의 조절이다. 검은 비닐 천으로 가리는 것은 일조량이 많은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창의성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경의 ‘인위적’이지만 절대적인 조성을 어버이들이, 이 땅의 어른들이 맡아야 한다. 즉, 콩나물이 자라도록 물을 주는 일과 햇볕을 다 쬐지 못하도록 차양막을 설치하는 일 등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절로 자라게 될 것이다.
▣믿을 놈 하나 없네?
연전에 (2000년 3월 20일) 신문에서 안타까운 기사를 읽었다. 여중생 살해 사건의 범인이 열 다섯 살 먹은 중학생이었다는 것이다. 범행 동기도 간단했다. 술을 먹고 들어와서 엄마와 누나에게 욕을 하는 아빠를 말렸지만, 학교 성적을 들먹이며 나무라기에 홧김에 칼을 들고 와서 낯 모르는 여중생을 만나 그냥 찔렀다는 것이다. 학교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생활이나 교우관계는 원만한 모범생이었다는 선생님의 말도 함께 실려 있었다. 부모의 행동이 자녀의 인격 형성이나 가치 판단에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그렇다면 내 아이는 어떠한가? 요즘은 어떤 일방적(一方的)이고 일회적(一回的)이며 단선적(單線的)인 기준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다방적(多方的)이고 다회적(多回的)이며 복합적(複合的)인 기준이 통용되는 시대이다. ‘착하다’는 개념은 상식적으로는 좋은 개념인데, ‘착하기만 해 가지고는…’이라고 말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책을 잘 읽는다’는 것도 좋은 의미중의 하나인데, ‘책벌레’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언어에 있어서도 다의적이고 이중적인 가치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은 쉽게 통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창의적인 ‘multi'개념이 통용되고 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형의 사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팔방미인은 어떤 기술이나 테크닉의 영역에서 다종 다양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극대화 표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팔방’이다. 즉, 관계의 유연성, 사고의 탄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술고래인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술에 대한 인식을 갖고 비교해 보면, 똑 같이 술고래이거나 아니면 술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갖는 것은 지난 세기의 관점이라면, 술을 드시는 아버지를 위해 다양한 방법의 음주 양태나, 음주와 단주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21세기형 유연성이다.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여러 방법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답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답이 나올 수 있는 개연성(蓋然性)이 통하는 시대이다.
믿을 놈 하나 없다 하고 내 자식도 믿을 수 없는 안타까운 세상이 되버린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만 사람이 희망이라는 진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창의성과 책 읽기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하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 새로운 경험을 접하게 하는 가상 현실로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책 읽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얻음’을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창의성’향상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어떤 얻음을 생각하는 것이 어버이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책 읽기를 통해서 당장 눈 앞에 가시적인 효과를 생각한다면 그 책 읽기는 당장 그만 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극단적인 것 같아 그만 두기로 하자.
책 읽기는 어쩌면 콩나물을 키우는 물과 같은 존재이다. 콩나물을 키우는데 물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대부분이 밑으로 빠져버린다고 콩나물을 키우는 실제 양만을 주면 과연 콩나물을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콩나물을 먹을 수 없을 지 모른다. 다 빠져간다고 해서 다 빠져나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책 읽기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접근’이라기 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어른들의 책 읽기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목적들이 있지만, 아이들의 책읽기는 또래 아이들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의 모방과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속에서 성장하는 아주 다양한 놀이중의 하나이다. 즉 책은 중요한 놀잇감의 하나이며, 책 읽기는 다양한 놀이방법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부모들의 욕심을 벗어난다면 아이들의 책읽기는 훨씬 즐거운 일이 될테고, ‘창의성’도 저절로 자라게 될 것이다.
부모들이 창의성과 관련하여 가장 쉽게 범하는 우(愚)가 창의성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그 시작과 끝을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작과 끝을 알면 그것은 이미 창의성이 아니다.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창의성은 제한적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의 세계는 무궁하다는 것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
*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