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7. 6. 21:47
칼바람




난 한번도 미시령 마루턱을

쉽게넘지 않았다

그 고갯마루 바람 앞에

제물을 쌓아두고

한 없는 경모를 올리고 난 뒤

겨우 한 걸음을 내딛고

다시 신의 뜻을 물어

길이, 뒤엎어지지 않는다면

움츠린 낯으로 허리를 숙이고

젖은 신발을 끌고

미시령 고갯길을 넘었다

저, 저, 저 눈아래

용대리가 옹알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내려치고

산. 산. 이 부서져 내리는

어긋난 신앙이 두 손을 모은다

설악, 이름값 하려는지

칼바람으로 가르는 한 겨울이

이곳에서 또 얼고 있다.



◀시작노트▶

이 시를 쓰던 날이 정확히 기억난다. 그날은 아마 내 그리움을 들고 가던 겨울 철새들이 태백준령을 넘으며 마지막 힘을 모으던 날이었다. 바람이 아렸고 눈은 나무 가지를 꺾으며 흩어졌다. 하얀 백설의 군무는 그치질 않았다.

그런 날 군장(배낭)을 매고 미시령 고갯길을 넘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시원스레 놓였지만, 그 당시엔 울퉁한 바위들이 즐비한 걷기에도 힘든 길이었다. 미시령을 넘기는 어지간한 인내가 아니면 힘든 길이었다.

설악산을 달려오는 바람이 마지막 힘을 모아 속초 앞바다로 달려가면 뭐랄까, 온몸을 난도질하듯 바람끝이 칼날이었다. 쉬지 않고 걸었으니 몸안에선 적당히 땀이 흐르고 그 땀은 바로 서릿발이 되어 몸을 헤집어놓는다. 피를 쏟을 시간조차 없이 내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실존의 순간이기도 했다.

이 시작노트를 쓰는 지금은 태풍 라마순이 온 강토를 헤집고 지난 뒤이다. 소중한 목숨과 재산의 피해가 많았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떠났다. 그런데 지금 너무 덥다. 그 칼바람이 그리운 간사함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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