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의 향 기▒

내 컴퓨터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6. 14. 12:46
내 컴퓨터





내가 부르는 사람은

어느 깊은 산 먼 하늘 위로

길 떠났는지

한 생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소식이 없다



오랜 만남의 희원(希願)이

하얀 파도로 부서지는 날

아름다운 이별을 하리라

고운 꿈을 키웠는데

산-산-히-부-서-진-몸-은

서로 그리워 섬이 되고

사랑하고 살아야 할 세상이

모두 죽어간 날에

나 또한 죽음을 부르고 있다



꿈이 잠든 날에 함께 잠들어

내 가슴속에 그대를 감추고

은밀한 속살을 보듬어

지친 가슴을 달래고 싶었는데

떠나간 사랑은 매정하다



새로이 사람을 만난다는 게

여간한 두려움이 아니어

혼자 삭이는 외로움의 크기,

마음의 끝을 쫓으면

억겁 세월이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내 컴퓨터는

부르면 대답하고

쌓아두면 쌓아둔 대로

내 외로움과 동행하여

그리움을 녹이고 있다.



◀시작노트▶

요즘은 무엇이든지 빠르다. 컴퓨터가 빠르다. 사람은 더 빠른 것을 원한다. 빠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떤다. 그러니 좀 더딘 사람은 사람이 덜되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것에 빨라야 하고, 더뎌야 하는지 기준이 없다. 자기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이 없기도 마찬가지다.

더디고, 차분하고, 느리고, 천천히란 말은 사회적 약자의 말이 되어 버렸다. 천천히 차를 모는 사람이 빠르게 차를 모는 사람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느리게, 아니지 규정속도로 운전을 해도 빨리 가지 않는다고 크랙숀을 누른다. 아주 빠르게.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배우면 남보다 빨라야 하고 월등해야 된다고 믿는다. 어려서 '3'자를 쓰면 꼭 기러기 나는 모습처럼 써서 내가 쓰는 '3'자를 기러기 '3'자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왜 잘못됐는지 알기 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큰 아이 민성이는 마음에 거울을 두고 있나보다. 자기 이름을 쓰는데도 꼭 뒤집어쓴다. 꼭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난 그 옆에서 이름 전부를 거꾸로 써보라고 한다. 다른 글자를 써주면서 한번 써보라고 한다. 뭔가 생각이 있을거다. 지켜봐 주면 알아서 쓸게다.

난 컴퓨터를 엑스티부터 썼다. 286, 386, 486, 펜티엄까지 차근 차근 그 빠름에 적응하느라 돈도 많이 갖다 바쳤다. 요즘들어서야 그 빠름에 적응할게 아니라 내 나름의 느림에 익숙할걸 하고 후회도 든다.

좀 모자란 듯이, 아쉬운 듯이, 서운한 듯이, 더디고, 느리게 사는 것도 세상을 사는 멋진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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