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529) - 한 잔의 차, 한 조각 마음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5. 29. 22:39
오늘 그린 풍경화 - 한 잔의 차, 한 조각 마음





차와 벗 한지 어언 십수년이 지났다. 가까이 있는 벗들과 정담을 나누며 차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찻물이 들었나보다. 다도(茶道)라고 이름의 차 문화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 때론 차가 주는 고적한 삶의 맛이 좋아 흠씬 취하다보니 오늘이다.

내가 가진 욕심 가운데 하나가 차 욕심이다. 책 욕심과 거의 쌍벽을 이룬다고나 할까. 난 차를 마실 때 특별한 격식을 따지지는 않는다. 단지 차 한잔 입안에 감아두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지고 옥지(玉池)에선 단침이 고인다.

차를 마시는데 여유가 있건 없건 그건 큰 문제 되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듯이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요즘엔 가루녹차를 사서 운전할 때 찬 물에 넣어 마신다. 굉장히 맑고 시원한 맛이다. 하기야 차를 제대로 마시려면 다기와 분위기, 좋은 차가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 얽매여 차의 참맛을 놓친다면 형식에 얽매여 내용을 잃는 짝이 아닐까 싶다.

하긴 나도 한때는 차에 미친 적이 있다. 한번은 미쳐봐야 제대로 좋아하던지 지독한 짝사랑을 하던지 하는가 보다. 지금도 내겐 10여종의 다기와 각종 다구들이 있다. 찻상도 돌, 프라타나스, 문살로 만든 찻상 등 여러 개를 갖고 있다.

전남 영광에 살 때의 일이다. 난 그 때 연꽃이 필 때 ‘뽁뽁’거리며 소리가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연꽃이 필 때쯤 저녁나절에 연잎가득 세작을 넣고 실로 묶어두면 달빛이 두런대는 소리, 밤벌레 울음소리, 보은강 물빛에 감기던 말간 물색들이 모여 사리(舍利)처럼 영글던 아침이슬에 젖으면 살포시 거두어 두고두고 아껴먹었었다. 차와 연잎을 함께 우려마시면 뭐랄까, 몸이 가벼워져 따로이 마음을 챙기지 않아도 선경(禪境)이 된다. 그야말로 오묘한 맛이다. 하긴 연잎차를 만들려면 여간 부지런해야 하는게 아니다. 차향속에 은근하게 배어있는 연꽃향은 마음을 비우게 한다.

또 다른 일은 찔레차를 준비하는 일이다. 찔레꽃을 따서 그늘에 말렸다가 녹차 우린 잔 위에 띄우면 그 계절이 어느 철이던지 늦봄 햇살을 그대로 옮겨온 맛이다. 연한 새순을 모아서 뜨거운 솥에 덖은 뒤 그늘에 말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 ‘엄마일 가는 길’에 피었던 하얀 찔레꽃향과 껍질을 벗겨먹던 알쏘롬한 찔레 줄기의 초록맛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가끔은 벗들과 함께 감잎차를 만들기도 했다. 물처럼 끓여 마시기엔 감잎차만큼 편리한 게 없다. 그리고 수국의 여린 잎으로 만드는 수국차는 그 화사한 꽃잎만큼이나 차 맛이 달큰하다. 그리고 죽순이 훌쩍 자란 여린 댓잎으로 만든 죽차는 차맛이 조금 비릿하기는 해도 두고 두고 그 맛이 입안에 맴돌고 가슴에 남는 차 맛이다. 그러고 보니 꽤나 여러 가지의 차를 만들어 마셨다. 흔히 ‘차’하면 가장 쉽게 녹차를 떠올리지만 주위엔 찻감이 널리고 널려있다. 우리의 산과 들에 조금만 관심가지면 나만의 색다른 차를 만들어 마실 수도 있는거다.

중국에 갔을 때 마셔본 여러 차들도 생각난다. 중국에선 차를 한잔 두잔 마시는 게 아니라 밤을 새우며 마신다. 찻집에 차를 한통 사놓고 다음에 갈땐 물값만 내고 그 차를 마신다. 술집에 술 맡겨두고 먹는 것과 똑 같다. 북경에서 조금 지낼 때 자주 다니던 찻집에 차 한통 사놓고 겨우 반통이나 먹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까운 마음이 인다. 많은 중국차 가운데서 가장 황홀했던 차 맛은 주자(朱子)가 죽벌(竹筏, 대나무로 만든 배)을 타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돌아와 다동(茶洞) 동굴의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으면 마셔본 무이차(武夷茶)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입안에 감기는 맛은 경남 하동 횡천강가에 있던 친구녀석 집 대밭에서 자라던 죽로(竹露)를 하루 종일 따서 덖지 않고 비벼 만든 차맛이 지금까지 가장 기억이 남는 차맛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엔 차 마실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마시는 차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다.

며칠전에 익산에서 전국 차인회 모임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차인들이 갖가지 차를 우리는데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차도 있었고, 각종 다식(茶食)도 오밀조밀한 맛이 오랫동안 입안에 남는다. 그 자리에서 부산에 살 때 인연이 있던 한 분을 6년만에 만났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가져오신 차를 한통 주신다. 난 뭐 드릴 것이 없어 웃음 한 자락 실풋 흘려드렸다. 차향에 흠씬 취할 수 있다는 하나만으로도 은혜가 넘치고 행복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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