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504) - 여행 전날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5. 5. 01:28
오늘 그린 풍경화 - 여행 전날
길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짐만 챙겼다. 그것은 ‘나이’라는 짐과 ‘사랑’이라는 짐이다. 생각보다 짐은 가볍다. 욕심내지 않고 산 덕분이리라. 떠날 날은 초여름이 좋을 것 같다. 살며 부대낀 일들을 생각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몇몇 벗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평소 하지 않던 연락이 온다. 그러고 나도 어지간히 무심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전날의 설렘이 초등학교 소풍 전날 몹시도 비가 오는 날, 활짝 개인 날씨이길 기도하는 그런 마음이다.
조용히 살아온 지난날을 곱씹어본다. 내 기억의 창에 떠오르지 않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텐데, 모든 게 찰라이고 순간이다. 그만큼 살아온 날들이 많지 않다는 얘기이다. 싸논 짐을 끌러보았다. 나이가 차곡차곡 쌓여져 있다. 기억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갓 났을 때 하얀 강보에 싸여 배내웃음 짓던 모습하며, 어린 시절 가난의 땟 국물이 졸졸 흐르던 기억의 강물도 흐른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 도화지를 준비하지 못했다. 5형제의 틈새에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손을 벌리곤 하던 날, ‘그냥 가지 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지 한 장이 아니라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던 부잣집 아이들에게 한 장 빌릴 요량을 했다. 그날따라 무슨 골이 났는지 모르지만, 매몰차게도 뒤돌아 앉는다. 더 이상 긴 얘기를 하진 않았다. 선생님이 오셔서는 준비물을 꺼내놓으란다. 당연한 일이지만 난 꺼내 놓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너댓명은 준비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수업이 안된다’며 칠판에 얼굴을 문질렀다. 아마 그 기억은 내 평생 가장 부끄러운 과거인 듯 하다.
걷고 때론 뛰고 어린 나이의 오기였는지, 아니면 젊음의 객기였는지 모르지만 어느 덧 보따리 하나를 챙길 나이가 되었다. ‘죽음’이라는 보따리이다. 죽음이 어떤 순간의 모습인줄 알았는데 살아온 모든 날들이 농축되고 농축된 사리(舍利)보다 영롱한 모습이었다. 나 그렇게 지금 보따리 하나를 챙겨놓는다.
창이 조금 흔들거린다.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멀리 달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그랬을거란 생각이 든다. 적막의 세상이다. 난 지금껏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가, 절망 앞에서 희망을 얘기할 줄 알고, 두려움 앞에서 웃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지 뒤돌아보아진다. 때론 비겁하게 행동한 적도 많다. 피하려 하고 내 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홀로 가는 길에 서있는 것처럼 고고하려 한 적도 많다.
내 몸이 고맙다. 이 정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살을 키워준 건 순전히 몸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아팠다. 지금 보다 훨씬 앞서 죽음 앞에 불려가 허허로운 웃음을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내 몸이 싸우지 않고 함께 잘 살아준 덕택이다.
폐에 구멍이 숭숭 뚫려 온갖 세상 바람을 맞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함께 살았다. 그 아픔까지도. 나와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난 사랑했는데, 결핵이 먼저 떠나갔다. 내게 있을 땐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벗하진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한 친구가 떠나자, 간이 오그라들었다. 쉽게 세상과 타협하려했다. 몸이 고장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모두 버렸다. 부산에서 한의원을 하는 친구가 끊이지 않고 대주던 파우치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던 약알들, 모두 버렸다. 파우치를 뜯어 나무에 거름으로 주었더니 그해 가을 어찌나 많은 감이 열렸던지, 까치밥을 넉넉히 남기고도 군입정이 너끈하였다.
어느 날 몸이 고맙다고 인사를 해 왔다. 스스로 하고 싶었는데, 자꾸 약만 들이미니 쉬어지더란다. 자기에게 할 일을 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한다. 그 소린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했다. 그 사랑들이 한 보따리이다. 놓고 갈 수도, 누구에게 맡겨둘 수도 없다. 내 사랑이니 누구에게 주겠는가. 자잘자잘한 사랑의 흔적들이 참 많기도 하다.
출발 전날 돌이켜보는 여정이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말은 단지 편안하고 즐겁고 유쾌할거란 생각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 슬픔과 아픔에 가위 눌릴지라도 황홀할 것이고, 좌절하고 낙심이 되더라도 황홀할 것이고, 외롭고 쓸쓸할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도 황홀한 일일 것 같다.
바람이 세차진다. 일기예보는 내일 큰 비가 온다고 한다. 떠나기로 한 약속을 되 물릴 수 없다. 단지, 그대가 나와 동행이라는 사실이 가장 우선이다. 최선의 고려사항이다, 나머지는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 그대와 함께이니. 아! 이 아름다운 여행.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길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짐만 챙겼다. 그것은 ‘나이’라는 짐과 ‘사랑’이라는 짐이다. 생각보다 짐은 가볍다. 욕심내지 않고 산 덕분이리라. 떠날 날은 초여름이 좋을 것 같다. 살며 부대낀 일들을 생각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몇몇 벗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평소 하지 않던 연락이 온다. 그러고 나도 어지간히 무심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전날의 설렘이 초등학교 소풍 전날 몹시도 비가 오는 날, 활짝 개인 날씨이길 기도하는 그런 마음이다.
조용히 살아온 지난날을 곱씹어본다. 내 기억의 창에 떠오르지 않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텐데, 모든 게 찰라이고 순간이다. 그만큼 살아온 날들이 많지 않다는 얘기이다. 싸논 짐을 끌러보았다. 나이가 차곡차곡 쌓여져 있다. 기억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갓 났을 때 하얀 강보에 싸여 배내웃음 짓던 모습하며, 어린 시절 가난의 땟 국물이 졸졸 흐르던 기억의 강물도 흐른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 도화지를 준비하지 못했다. 5형제의 틈새에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손을 벌리곤 하던 날, ‘그냥 가지 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지 한 장이 아니라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던 부잣집 아이들에게 한 장 빌릴 요량을 했다. 그날따라 무슨 골이 났는지 모르지만, 매몰차게도 뒤돌아 앉는다. 더 이상 긴 얘기를 하진 않았다. 선생님이 오셔서는 준비물을 꺼내놓으란다. 당연한 일이지만 난 꺼내 놓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너댓명은 준비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수업이 안된다’며 칠판에 얼굴을 문질렀다. 아마 그 기억은 내 평생 가장 부끄러운 과거인 듯 하다.
걷고 때론 뛰고 어린 나이의 오기였는지, 아니면 젊음의 객기였는지 모르지만 어느 덧 보따리 하나를 챙길 나이가 되었다. ‘죽음’이라는 보따리이다. 죽음이 어떤 순간의 모습인줄 알았는데 살아온 모든 날들이 농축되고 농축된 사리(舍利)보다 영롱한 모습이었다. 나 그렇게 지금 보따리 하나를 챙겨놓는다.
창이 조금 흔들거린다.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멀리 달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그랬을거란 생각이 든다. 적막의 세상이다. 난 지금껏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가, 절망 앞에서 희망을 얘기할 줄 알고, 두려움 앞에서 웃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지 뒤돌아보아진다. 때론 비겁하게 행동한 적도 많다. 피하려 하고 내 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홀로 가는 길에 서있는 것처럼 고고하려 한 적도 많다.
내 몸이 고맙다. 이 정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살을 키워준 건 순전히 몸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아팠다. 지금 보다 훨씬 앞서 죽음 앞에 불려가 허허로운 웃음을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내 몸이 싸우지 않고 함께 잘 살아준 덕택이다.
폐에 구멍이 숭숭 뚫려 온갖 세상 바람을 맞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함께 살았다. 그 아픔까지도. 나와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난 사랑했는데, 결핵이 먼저 떠나갔다. 내게 있을 땐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벗하진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한 친구가 떠나자, 간이 오그라들었다. 쉽게 세상과 타협하려했다. 몸이 고장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모두 버렸다. 부산에서 한의원을 하는 친구가 끊이지 않고 대주던 파우치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던 약알들, 모두 버렸다. 파우치를 뜯어 나무에 거름으로 주었더니 그해 가을 어찌나 많은 감이 열렸던지, 까치밥을 넉넉히 남기고도 군입정이 너끈하였다.
어느 날 몸이 고맙다고 인사를 해 왔다. 스스로 하고 싶었는데, 자꾸 약만 들이미니 쉬어지더란다. 자기에게 할 일을 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한다. 그 소린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했다. 그 사랑들이 한 보따리이다. 놓고 갈 수도, 누구에게 맡겨둘 수도 없다. 내 사랑이니 누구에게 주겠는가. 자잘자잘한 사랑의 흔적들이 참 많기도 하다.
출발 전날 돌이켜보는 여정이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말은 단지 편안하고 즐겁고 유쾌할거란 생각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 슬픔과 아픔에 가위 눌릴지라도 황홀할 것이고, 좌절하고 낙심이 되더라도 황홀할 것이고, 외롭고 쓸쓸할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도 황홀한 일일 것 같다.
바람이 세차진다. 일기예보는 내일 큰 비가 온다고 한다. 떠나기로 한 약속을 되 물릴 수 없다. 단지, 그대가 나와 동행이라는 사실이 가장 우선이다. 최선의 고려사항이다, 나머지는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 그대와 함께이니. 아! 이 아름다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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