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숲이이원 2009. 5. 15. 11:17

화해

 

 

초등학교 시절 미술 준비는 도화지 한 장에 크레파스가 끝이었다. 4학년 때 미술준비를 해 가질 못했다. 그날 선생님은 무척 화가 나셔서 준비 못한 아이들을 불러 칠판을 얼굴을 문질렀다. 난 울 힘조차 없었고 그때가 처음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를 평생 ‘가슴앓이’하게 하는 평생의 짐이었다. 내가 스승의 자리에 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었다. 그날의 아픔은 유독 오늘 같은 스승의 날이면 더욱 또렷하게 되살아나 아프게 했다.

영산선학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노신사 몇 분이 구수산 등산을 마치고 성지에 들리셔서 안내를 부탁했다. 난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노인 분 중 한 분이 초등학교 시절 그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도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30년이 지난 일이었다. 내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 이행선 아닌가? 미안하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노인들은 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신 분들인데 모두 의아한 눈빛이었다. 영문을 몰라 나와 그 선생님의 눈빛만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30년 가슴앓이를 이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죠?”

 

교직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함부로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인데, 사과할 기회도 없이 평생 무거운 짐으로 지고 왔다고 한다.

영산성지, 학교 운동장에서 큰 절을 올렸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경건한 의례였다. 그날 저녁 영광읍내에서 저녁을 공양하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해드렸다. 대견하다시며 감사하다는 말을 쉬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