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 풍경화-일기, 마음보기와 삶의 기록 그리고 소통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책상 위에 연필 한 자루와 공책 한 권이 놓여있다. 큰 아이 민성이의 일기장이다. 아무리 노곤한 일상을 보냈다 해도 그 일기장은 꼭 읽고 잠자리에 든다. 사실 읽는 것만으로는 2,30초면 끝나는 일이지만 함께 ‘생각할 거리와 마음 씀의 흔적들’을 찾다보면 어느 때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요즘 초등학교 선생님이 일기장을 검사하는 관행이 인권을 침해하는 소지가 있으므로 개선해야 한다는 인권위의 의견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일기 쓰기와 검사가 교육적이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교육계의 유감 표명과 사적인 고백인 일기의 공개를 강제한다는 것은 사생활의 자유 등 기본권과 충돌한다고 보는 의견이 나뉨이 그것이다.
나는 어떤 의견이 옳고 그름을 떠나 생각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으로 내 뜻을 말하고 싶다. 요즘 나는 매일 두 건의 일기를 쓰고 있다. 다 모아 두지는 않았지만 30여년을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면서 생각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의 넓이가 조금씩 넓어졌음을 알겠다. 잠들기 전 까칠한 일기장 위에 사각사각 펜 굴러가는 소리는 시나 수필 등 다른 문학 작품을 쓸 때와는 또 다른 아취(雅趣)이다. 뭐랄까, ‘돌아봄의 여유와 멈춰 섬의 지혜가 발효되는 느낌’이 일기 쓰기이다. 나의 예전의 일기는 일상의 반성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의 일기는 일상의 기록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일지 식의 일기는 아니다. 작으나마 생각 거리와 마음 흐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보는 것이 사적인 영역을 얼마만큼 침해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아들 녀석의 일기장과 만나는 시간은 내게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다. 부자(父子)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 어릴 적 일기장엔 선생님의 ‘검’자 한 자가 쓰여 있을 뿐, 별다른 소통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아이의 일기를 읽고 내 생각의 일단과 고민의 방향을 적어두면 아이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듯 하다. 물론 아이는 자신의 일기장을 아빠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것에 대해 대단히 경계를 한다. 특히 동생들이 보려고 하면 더욱 그렇다. 내 경우를 모두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반 아이 모두의 일기장에 “코멘트”를 쓴다면 하루의 모두를 쏟아 부어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한 달에 서너 번은 어떨까? 가능하리라 본다. 이런 직접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숙제로써의 일기 쓰기가 아닌 마음보기와 삶의 기록으로써의 일기가 쓰여 지리라 확신한다.
이번 논란 가운데 소재의 빈곤과 선생님의 기준에 맞춰 사고를 정형화하는 폐해가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소재의 빈곤보다는 생각의 빈곤이 더욱 문제다. 생각의 나무를 키운다는 마음으로 일상을 돌아보게 하면 아이들의 생각은 끝 간곳없이 무한하다. 이 생각을 잘 갈무리 하는 습관이 바로 일기쓰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습관 듦’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일기의 모든 장단점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땅의 많은 어른들의 경험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일기는 숙제의 하나였고, 검사받기 위한 도구의 하나였음이 일기 쓰기의 가장 큰 벽이었다. 처음부터 일기 쓰기가 자연스럽다거나 부담을 갖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나는 조금의 생각 바꿈을 통해 이 문제를 풀고 싶다. 그것은 일기 쓰기의 완성이 검사로 끝나는 게 아니고 올바른 인성과 원래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하는 참다운 지도를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예전에 학생들의 일기를 검사하지 않고 지도하면서 학생들과 몇 가지 약속한 게 있다. 감추고 싶은 부분은 절대 들춰보지 않겠다는 약속과 철저한 이행을 통해서 아이들의 속내를 드러내 놓고 숨김없이 남김없이 쓰게 했더니 학생과 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일기 검사가 아닌 참다운 지도가 이루어지면 일기 쓰기의 교육적 효과는 모두 이루어 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기의 가장 큰 미덕은 ‘소통’이다. 난 벌써 민성이의 오늘 하루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