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116) - 안개비에 젖는 마음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 16. 21:58
오늘 그린 풍경화 - 안개비에 젖는 마음
하루 종일 안개비가 내립니다. 쓸쓸한 분위기도 연출되지만 뭐라 말하기 힘든 편안함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장성에 더 있을까 생각하다가 올핸 가족 곁에 있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까운 인연들의 도움으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의외로 소심하다는 얘길 듣는 저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장성에서 익산으로 가면 학교 나다니기가 어렵고 맡고 있는 일을 하는데도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한창 커 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과 일에 지친 아내의 짐을 덜어 주는 일도 사실 이번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아내는 어쩌면 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했지만, 이제는 남편의 몫을 챙겨 주어야 하는 일을 아내는 새로운 일로 생각하는가 봅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아내에게 부담을 덜 주는 선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장성을 떠나려니 새로 맺은 많은 인연들이 눈에 아른합니다. 거개가 제 또래는 없고 서로 서로의 알음알음으로 만난 그야말로 "나이를 잊고 만나는 망년(忘年)의 벗"들입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공무원, 농사꾼 등등해서 한결같이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오후 내내 비워 두었으니 만나자고 몸을 이끕니다. 장성에 와서 이름 있는 곳은 다 가 보았지만 가까이 두고도 가보지 못한 동학과 관련이 있는 황룡 전적지와 필암서원을 다시 한 번 가 보기로 했습니다.
황룡전적지는 동학농민군이 경군(京軍)을 물리친 최초의 전적지입니다. 전적지 한 구석에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비석은 동학농민군과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경군대장의 순의비(殉義碑)인데, 질척이는 겨울 황톳길을 걸어 그곳에 가보니 비석만 뎅그렇고 사방엔 잡풀만 웃자라 있고 비석 한 면이 기울어져 있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무심한 세월을 견뎌온 봄풀들만 초록빛을 모으는 중입니다.
오랜 세월에 바랜 비석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왜 싸웠고, 왜 죽어갔는지에 대한 상념의 스산함이 겨울바람에 묻어옵니다. 비문의 첫머리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호라. 이곳은 장성부에서 서쪽으로 10여리 떨어진 화현(華峴 ; 꽃재, 아마도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지, 어쨌거나 확인할 길은 없으니)의 옛 땅으로 선전관(宣傳官) 이학승이 의를 위하다가 죽은 곳이다." 그 마지막엔 "생명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했다(捨生取義)"라는 말로 그의 절의를 적고 있습니다. 조금 더 역사적 사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 황룡전적지는 농민군이 대포 등 신무기로 무장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하여 전주성을 무혈입성하는 시초가 된 곳으로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농민군은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선봉장인 이학승을 죽이고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정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쯤에서 황룡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인 탑을 둘러보았습니다. 탑의 전면엔 농민군과 경군이 싸우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있는데, 얼른 보기에도 농민군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있고 의지에 불타는 모습이나 경군의 모습은 나약하게 쫓기면서 삶을 구걸하는 모습입니다. 그 부조 위에는 장태를 굴리는 농민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은 죽창 모습의 높은 탑입니다. 탑의 뒷면엔 곽재구 시인이 쓴 <조선의 눈동자>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조선의 눈동자들은/황룡들에서 빛난다//그날, 우리들은/짚신발과 죽창으로/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맞딱뜨려 싸웠다//청죽으로 엮은/장태를 굴리며 또 굴리며/허울뿐인 왕조의 야포와 기관총을/한판 신명나게 두둘겨 부쉈다//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오직 하나//복사꽃처럼/호박꽃처럼/착하고 순결한/우리 조선 사람들의/사람다운 삶과 구들장 뜨거운 자유//아, 우리는/우리들의 살갗에 불어오는/한없이 달디 단 조선의 바람과/순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들과/그 어떤 외세나 사갈의 이름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한없이 파란 조선의 하늘의/참주인이 되고자 했다//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손주가/한상에서 김 나는 흰 쌀밥을 먹고/장관과 머슴과 작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민들레와 파랑새가 우리들의 황토언덕을/순결한 노래로 천년 만년뒤덮는 꿈을 꾸었다//조선의 눈동자들은/황룡들에서 빛난다//그 모든 낡아빠진 것들과/그 모든 썩어빠진 것들과/그 모든 억압과 죽음의 이름들을 불태우며/조선의 눈동자들은 이 땅/이 산 언덕에서 뜨겁게 빛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농민군과 싸웠던 경군은 과연 어느 나라의 백성이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위의 시나 현재적 역사 인식의 맥락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은 역사의 승리자였고 경군은 역사의 패배자였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봉건사회에서 민초들의 삶은 거개가 뻔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어느 한 면만을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저를 양비론자나 이상론자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역사적 사실 하나를 더 상기해 봅니다.
지리산에는 이 나라 마지막 빨치산들이 은거하며 사회주의 이상의 깃발을 높이 들고 싸웠던 곳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 생명의 피가 지리산 곳곳에 뿌려져 저리도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역사가 흐른 뒤 그 땅에서 살 던 사람들은 경찰이나 군인들은 위령비와 충혼비가 세워지고 각종 보훈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빨치산들은 죽어지낸 세월이 반백년이 지났음에도 용서받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작년 봄에 각 종교계가 합심하여 피아(彼我)를 물론하고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실상사앞 광장에서 천도위령제(薦度慰靈祭)를 모셔 늦게나마 쌓인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를 깨끗하게 청산 한 뒤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냐 하면 그것도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역사적 사실 하나를 떠올려봅니다. 80년대 초에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있는 동원탄좌라고 하는 광산촌에서 "광부들의 슬픈 외침"이 있었습니다. 회사측과 결탁한 노조지부장의 전횡을 알고 여러 채널로 대화를 시도해도 되지 않자 성난 광부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당시 그 현장에서 이 사실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사리분별이 분명치 않은 어린 나이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제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 얼마있지 않아 광주에서 광주사태를 목격했습니다. 지금은 열린 세상이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모두 다 알고 있으나, 아무도 그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 사태를 보아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농민군이 행동강령으로 정한 사대강령(四大綱領)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둘째, 충과 효를 함께 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셋째,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 도를 밝힌다,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입니다. 세 번째까지의 조목은 누구나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할 역사적 당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경군이라고 해서 사람이나 생명을 함부로 한 것이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나라의 명령에 따라 먼길을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어갔습니다.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과 권신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말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단은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역사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그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미래의 지남으로 삼아야 하는가. 저는 옷깃을 여미며 농민군 뿐만이 아니라 경군으로 참여하여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명목을 빌어봅니다. 아마도 올봄엔 이 동산에 유난히 붉은 복숭아꽃이 만발할 것 같고, 농민군을 위한 승리기념탑 뿐만이 아니라 경군을 위해서도 위령탑을 세우고 함께 추모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덧붙임 : 장성을 떠나오면서 아름다운 벗들과 함께 한 맛과 멋과 흥의 신명을 세 꼭지 정도 나누어 적겠습니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
하루 종일 안개비가 내립니다. 쓸쓸한 분위기도 연출되지만 뭐라 말하기 힘든 편안함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장성에 더 있을까 생각하다가 올핸 가족 곁에 있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까운 인연들의 도움으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의외로 소심하다는 얘길 듣는 저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장성에서 익산으로 가면 학교 나다니기가 어렵고 맡고 있는 일을 하는데도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한창 커 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과 일에 지친 아내의 짐을 덜어 주는 일도 사실 이번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아내는 어쩌면 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했지만, 이제는 남편의 몫을 챙겨 주어야 하는 일을 아내는 새로운 일로 생각하는가 봅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아내에게 부담을 덜 주는 선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장성을 떠나려니 새로 맺은 많은 인연들이 눈에 아른합니다. 거개가 제 또래는 없고 서로 서로의 알음알음으로 만난 그야말로 "나이를 잊고 만나는 망년(忘年)의 벗"들입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공무원, 농사꾼 등등해서 한결같이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오후 내내 비워 두었으니 만나자고 몸을 이끕니다. 장성에 와서 이름 있는 곳은 다 가 보았지만 가까이 두고도 가보지 못한 동학과 관련이 있는 황룡 전적지와 필암서원을 다시 한 번 가 보기로 했습니다.
황룡전적지는 동학농민군이 경군(京軍)을 물리친 최초의 전적지입니다. 전적지 한 구석에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비석은 동학농민군과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경군대장의 순의비(殉義碑)인데, 질척이는 겨울 황톳길을 걸어 그곳에 가보니 비석만 뎅그렇고 사방엔 잡풀만 웃자라 있고 비석 한 면이 기울어져 있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무심한 세월을 견뎌온 봄풀들만 초록빛을 모으는 중입니다.
오랜 세월에 바랜 비석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왜 싸웠고, 왜 죽어갔는지에 대한 상념의 스산함이 겨울바람에 묻어옵니다. 비문의 첫머리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호라. 이곳은 장성부에서 서쪽으로 10여리 떨어진 화현(華峴 ; 꽃재, 아마도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지, 어쨌거나 확인할 길은 없으니)의 옛 땅으로 선전관(宣傳官) 이학승이 의를 위하다가 죽은 곳이다." 그 마지막엔 "생명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했다(捨生取義)"라는 말로 그의 절의를 적고 있습니다. 조금 더 역사적 사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 황룡전적지는 농민군이 대포 등 신무기로 무장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하여 전주성을 무혈입성하는 시초가 된 곳으로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농민군은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선봉장인 이학승을 죽이고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정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쯤에서 황룡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인 탑을 둘러보았습니다. 탑의 전면엔 농민군과 경군이 싸우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있는데, 얼른 보기에도 농민군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있고 의지에 불타는 모습이나 경군의 모습은 나약하게 쫓기면서 삶을 구걸하는 모습입니다. 그 부조 위에는 장태를 굴리는 농민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은 죽창 모습의 높은 탑입니다. 탑의 뒷면엔 곽재구 시인이 쓴 <조선의 눈동자>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조선의 눈동자들은/황룡들에서 빛난다//그날, 우리들은/짚신발과 죽창으로/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맞딱뜨려 싸웠다//청죽으로 엮은/장태를 굴리며 또 굴리며/허울뿐인 왕조의 야포와 기관총을/한판 신명나게 두둘겨 부쉈다//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오직 하나//복사꽃처럼/호박꽃처럼/착하고 순결한/우리 조선 사람들의/사람다운 삶과 구들장 뜨거운 자유//아, 우리는/우리들의 살갗에 불어오는/한없이 달디 단 조선의 바람과/순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들과/그 어떤 외세나 사갈의 이름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한없이 파란 조선의 하늘의/참주인이 되고자 했다//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손주가/한상에서 김 나는 흰 쌀밥을 먹고/장관과 머슴과 작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민들레와 파랑새가 우리들의 황토언덕을/순결한 노래로 천년 만년뒤덮는 꿈을 꾸었다//조선의 눈동자들은/황룡들에서 빛난다//그 모든 낡아빠진 것들과/그 모든 썩어빠진 것들과/그 모든 억압과 죽음의 이름들을 불태우며/조선의 눈동자들은 이 땅/이 산 언덕에서 뜨겁게 빛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농민군과 싸웠던 경군은 과연 어느 나라의 백성이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위의 시나 현재적 역사 인식의 맥락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은 역사의 승리자였고 경군은 역사의 패배자였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봉건사회에서 민초들의 삶은 거개가 뻔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어느 한 면만을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저를 양비론자나 이상론자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역사적 사실 하나를 더 상기해 봅니다.
지리산에는 이 나라 마지막 빨치산들이 은거하며 사회주의 이상의 깃발을 높이 들고 싸웠던 곳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 생명의 피가 지리산 곳곳에 뿌려져 저리도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역사가 흐른 뒤 그 땅에서 살 던 사람들은 경찰이나 군인들은 위령비와 충혼비가 세워지고 각종 보훈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빨치산들은 죽어지낸 세월이 반백년이 지났음에도 용서받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작년 봄에 각 종교계가 합심하여 피아(彼我)를 물론하고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실상사앞 광장에서 천도위령제(薦度慰靈祭)를 모셔 늦게나마 쌓인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를 깨끗하게 청산 한 뒤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냐 하면 그것도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역사적 사실 하나를 떠올려봅니다. 80년대 초에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있는 동원탄좌라고 하는 광산촌에서 "광부들의 슬픈 외침"이 있었습니다. 회사측과 결탁한 노조지부장의 전횡을 알고 여러 채널로 대화를 시도해도 되지 않자 성난 광부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당시 그 현장에서 이 사실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사리분별이 분명치 않은 어린 나이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제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 얼마있지 않아 광주에서 광주사태를 목격했습니다. 지금은 열린 세상이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모두 다 알고 있으나, 아무도 그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 사태를 보아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농민군이 행동강령으로 정한 사대강령(四大綱領)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둘째, 충과 효를 함께 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셋째,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 도를 밝힌다,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입니다. 세 번째까지의 조목은 누구나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할 역사적 당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경군이라고 해서 사람이나 생명을 함부로 한 것이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나라의 명령에 따라 먼길을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어갔습니다.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과 권신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말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단은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역사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그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미래의 지남으로 삼아야 하는가. 저는 옷깃을 여미며 농민군 뿐만이 아니라 경군으로 참여하여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명목을 빌어봅니다. 아마도 올봄엔 이 동산에 유난히 붉은 복숭아꽃이 만발할 것 같고, 농민군을 위한 승리기념탑 뿐만이 아니라 경군을 위해서도 위령탑을 세우고 함께 추모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덧붙임 : 장성을 떠나오면서 아름다운 벗들과 함께 한 맛과 멋과 흥의 신명을 세 꼭지 정도 나누어 적겠습니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