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0226) - 사이를 가꾸는 책읽기

자작나무숲이이원 2002. 1. 11. 08:28
오늘 그린 풍경화 - 사이를 가꾸는 책읽기






나는 지금 컴퓨터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오는 따스한 봄 햇살을 방안에 욕심껏 들여놓고 조금은 어질러진 방바닥 사이로 삐쭉 삐쭉 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들을 보면 참 행복합니다.

내 서재에는 아주 오래된 책부터 최근에 산 책 들까지 해서 이천여권의 책이 있습니다. 모두다 필요해서 직접 사기도 하고 얻은 책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내 손을 거쳐간 책들 이어서인지 모두가 다 사랑스런 내 지기(知己)이자 애인입니다. 나는 다른 욕심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책 욕심은 무척 많은 것 같습니다.

나의 책읽기 여정을 가만 되돌아봅니다. 초중고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그하나만으로도 어린 날의 모든 추억이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상도 받았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요즘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꼭 필요한 전공서적을 중심으로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씩은 보았던 책들이지만 다시금 보니 더욱 새롭습니다. 모두가 다 고전(古典)이라고 일컫는 책들입니다.

<주역(周易)>, 정약용의 <대학공의(大學公議)>, 배종호의 <한국유학사>, <주희집(朱熹集> 가운데 주희의 서신(書信)을 읽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한문 일색이지만 곱씹을수록 그 맛이 새롭습니다. 아마도 고전이 주는 향기가 아닐까. 하지만 모두가 다 이런 책들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책읽기와 담을 쌓기도 하고 또 읽고 싶어도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다 생활에 쫓겨 일년에 서너권 읽기도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IMF 하의 어려운 경제현실은 우리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세계 유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도 한 번쯤은 거친 일들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만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왜일까. 난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호흡이 너무 짧다'는 것이죠.

짧은 호흡으로는 가까운 거리 밖에 갈 수가 없습니다.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경제공황이 닥치자 미국 사람들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영화관에 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헐리우드 식'이라고 미국 영화를 폄하(貶下)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세계관, 인생관과 우주관을 담고 있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그걸 굳이 우리식의 잣대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서점에 갔다고 합니다. 지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갈 때 본인이 직접 읽을 책도 사고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서도 책을 사가지고 들어가는 일본의 샐러리맨을 생각해 보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그들의 오랜 사유와 경험의 세계를 바르게 정리해 놓은 책을 통해서 그 해법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 IMF의 경제 위기가 닥치자 다들 삼겹살집에서 소주 잔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구조조정·명예퇴직·빅딜 등 평소에 보도 듣도 못한 경제 환경속에서 가슴 아픈 일도 많고 절망과 좌절, 울분과 허탈한 마음도 들겠지만,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들이킨다고 문제가 풀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결과론적으로만 얘기한 것 같은데, 이제부터 그 과정을 이야기해 보죠. 나는 삶이나 책 읽기를 '사이 가꾸기'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무슨 책이든지 한 권의 책을 들고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우선은 내 마음속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돌아갈 줄 아는 지혜, 멈춰설 줄 아는 지혜 등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 있다고 해도 내가 읽을 마음이 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시간도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변상(便上)·마상(馬上)·침상(寢上)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 읽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 화장실에 앉아서, 말 위에 앉아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책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자기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장소의 문제는 이왕이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나의 주체적 자각과 시간과 공간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人間)과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는 모두 '사이 간(間)'이라는 글자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내가 그 사이를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롭게 만드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우선 혼자 책 읽는 즐거움을 만들어 보지요. 아이들과 씨름 하지 않아도 될 시간과 공간, 집안 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놓고 우선 집안에 돌아다니는 책부터 읽어보죠. 드러누워 읽던지 책상에 앉아 읽던지 소파에 앉아서 과자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읽던지 그건 관계 없습니다. 다만 책읽는 재미에 빠져 계속 너무 간식을 많이 먹다보면 살이 놀라게 되니 유의해야 할 바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광고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잔잔한 바로크 음악이 흐르고 원두커피향이 가득한 집안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책을 읽어보죠. 그 때 부터는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면서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엑스트라로 살 것인가는 바로 "사이를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시간이 난다면 읽을 책 한 권을 위해서 서점에 들러보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책을 한 권 삽시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전해봅시다. 아름다운 저녁이 될 것입니다.


자작나무숲 마음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