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이 가 꿈▒

오늘 그린 풍경화(1215) - 빈 뜰 숫눈을 쓸며

자작나무숲이이원 2001. 12. 15. 19:06
오늘 그린 풍경화 - 빈 뜰 숫눈을 쓸며






이른 새벽, 희번한 동녘 창가가 환히 밝은 모습입니다. 밤사이 제법 많은 눈이 내려 도시의 욕망들을 포근히 덮어주어 차분한 하루를 열고 있습니다.

말간 새벽 기운을 길게 마시며 대빗자루를 들고 집 주위에 쌓인 숫눈을 쓸면서 온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바지런한 몇몇 사람 종종 걸음으로 어딘가 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새 날이 시릿한 청량감으로 맑게 깨입니다. 어느 정도 눈 쓸기를 마치자 얼굴빛이 붉어지고 가슴속에도 따스한 온기가 퍼져 간 밤에 늘어졌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났습니다.

방안에 들어가 아직 잠깨지 않은 큰 아이 민성이의 등짝을 걷고 찬 손을 넣었더니 이 녀석이 바시시 일어나며 낯 찡그리지 않고 방싯거리며 웃는 겁니다. 참 행복이란 이런거구나 싶더라구요.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하얀 눈을 보여주었더니 '눈이예요. 눈이예요' 소리치며 좋아하는 모습이 분명 하늘사람이더군요. 기쁨의 빛살들이 방안에 가득 차는 겨울 아침입니다.

‘약속의 땅’이라 불렸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 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왜 있잖아요. 80년도에 성난 광부들이 삶의 자유를 외쳤던 무연탄을 생산하는 곳 말입니다. 아버님은 그 곳 동원탄좌의 선산부(숙련기술자)셨습니다.

사시 사철 까만 빛에 절어 사는 탄광촌에도 눈이 내리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검은 빛을 감추고 은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곳 산에는 낙엽송이 많이 자라는데 새봄에 연둣빛 새움을 달고 있을 때와 한 겨울에 은백색 눈꽃을 달고 있을 때 너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광산촌의 길은 제대로 포장이 안돼서 언제나 빙판길이기 십상이고, 한 번 제대로 언 길은 새봄이 올 때까지 녹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나 차가 다니기 여간 불편한 길이 아닌데도 사람이나 지에무씨(GMC) 자동차가 너끈히 다닐 수 있었던 건 이른 새벽 사람들이 내던진 연탄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군에 있을 때 보았던 눈도 생각이 납니다. 1986년 겨울에 얼마나 많은 눈이 왔는지, 앞산(설악산) 자락의 큰 나무들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쩍쩍 가지를 찢으며 생채기를 해댔습니다. 연병장 눈을 두개 대대 병력이 치워 부대 옆 계곡을 다져가며 메웠는데, 그 눈이 다 녹은 건 초여름 신록이 화사한 날이었습니다.

그 눈에 옴짝달짝 못하던 산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부대 인근까지 내려오면 마른 채소와 보리쌀 등을 뿌려준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대 취사장에도 제 때 부식이 공급되지 않아 근 10여일은 내리 미역국만 먹은 기억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추억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눈의 가장 큰 덕목은 ‘덮어줌’같습니다. 대자연은 포근한 눈이불을 한 번 덮으면서 한해 동안의 묵은 때를 벗는 듯 합니다. 왜, 우리도 새 이불을 덮을 때의 좋은 기분 있잖아요. 아마 자연도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한 해를 마감하면서 스스로 덮어둘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찾아보았으면 싶습니다. 너무 드러내서 부끄럽고 어지럽고 요란했던 내 삶에게 안부를 전하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이젠 내게도 조금 편안한 쉼을 주어야겠어요. 너무 옭죄며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하면서요.

눈의 다른 덕목은 ‘약속’같습니다. 왜 연인들끼리 첫눈 올 때 만날 약속들을 하잖아요. 눈 오는 날은 구체적으로 명시된 날이 아니어서 더 설레고 더 들뜨나 봅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올 해 했던 수 많은 약속들을 조용히 머리에 그리면서,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서 난처한 적은 없었는가를 가만히 되돌아봅니다.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 몇 가지를 위해 올 한해의 며칠동안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길거리에서 사랑의 모금운동을 하고, 각종 복지시설에서도 겨울날 채비를 하느라 마음이 더욱 바빠집니다. 눈 내린 빙판길을 다닐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이른 새벽에 뿌려준 연탄재이듯이 마음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길은 바로 지금 내미는 내 손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손 한번 내밀었을 뿐인데, 내 손을 잡은 그 사람은 생명을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빈 뜰 숫눈을 쓸고 난 뒤의 아침 밥상은 너무 맛있습니다. 하얀 쌀밥은 눈이 소복이 쌓인 것 같고, 반찬들도 오늘은 하얀 눈옷을 한꺼풀씩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차갑지 않고 너무 따뜻하다는 사실.


2001년 12월 15일
자작나무숲 마음모음